‘끝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그 봄날 열흘.’ 소설가 임철우씨가 80년 5월 광주를 그린 장편소설 ‘봄날’의 서문에 쓴 표현이다.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은 이 표현을 빌려 제주4·3을 설명했다. 끝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고. 제주4·3은 1947년이 시작점인 사건이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가 형성되고 나서야 겨우 말문을 틀 수 있었다. 그 이전 이승만 정권은 물론 군부독재정권 시절, 제주4·3은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4·3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40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종민 전 위원이 언론사 4·3취재반에서 일하며 4·3의 진실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시기도 이 즈음이다. 그는 기자 시절 13년을 포함해 지금까지 30년 넘게 4·3을 위해 자신의 삶을 투신하고 있다. 이젠 명실상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기자협회보는 4·3 제73주년을 맞아 지난 5일 제주시 도남로 인근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김 전 위원이 살아온 길, 아직도 4·3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묻고 들었다.
4·3취재반 들어간 햇병아리 기자가 혼자 남기까지
대학교 4학년 기말고사를 마친 1986년 겨울, 그의 지상 과제는 제주도로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그렇게 결심했고, 실제 7~8개월을 손에 흙을 묻히며 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였을까. 친척의 권유로 그는 1987년 여름, 우연찮게 제주신문에 입사했다. 당시는 전두환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제주에 유일한 일간지가 제주신문밖에 없던 때였다.
“정신없이 수습기간을 거치고 1988년이 됐는데 그 해가 4·3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기자들이 40주년 특집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고, 그것이 곧 4·3 진상규명을 위한 4·3특별취재반 결성으로 이어졌죠. 기자 16명으로 취재반이 구성됐는데 제가 막내였습니다. 갓 수습을 떼 검증도 안 된 기자였는데, 역사를 전공했다고 하니 사료 수집이나 정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초·중·고를 외지에서 다녔고 가족 중에 피해자도 없어 당시만 해도 그는 4·3에 대해 거의 백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다만 1년여의 준비 끝에 1989년 4월3일 ‘4·3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연재가 시작될 때쯤, 그는 이 작업이 자신의 일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그러나 제주신문에선 연재가 지속되지 못했다. 사주와의 투쟁으로 경영진이 기자들을 해고하는 ‘제주신문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직기자들은 굴하지 않고 사원 출자금과 도민주를 공모해 자본금을 마련, 1990년 제민일보를 창간했다. 그리고 기자 6명으로 4·3취재반을 다시 꾸려 창간호부터 ‘4·3의 증언’ 후신격인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주4·3은 1947년 3월1일 경찰 발포사건에서부터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된 1954년 9월21일까지 7년 7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주도 전역에서 약 3만명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사건이 너무 방대해 기초 사실조차 파악하기 어려웠고 자료도 턱없이 부족했죠. 도민들의 피해의식이 커 증언을 듣기도 힘들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시간이 많이 흘러 생존자들의 기억도 희미했고 워낙 민감한 사건이라 철저한 검증을 위한 다층취재 역시 필수적이었지요.”
연재는 탄압, 항쟁, 대량학살 등 세 국면으로 나눠 진행됐다. 김 전 위원은 양조훈 취재반장에 이어 대량학살의 전조 시기부터 연재를 맡아 집필했다. 첫 연재로부터 6년이 지나 있었고 취재반엔 기자 두 명밖에 남지 않았던 때였다. 처음에 그는 학살 유형별로 10개 정도의 마을을 선정해 대량학살 시기를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사나흘을 고민하다 결국 제주도 모든 마을을 취재하기로 했다. 조천면 교래리부터 시계 방향으로 진행해 제주읍 삼양리까지 총 2년 9개월간 7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연재로만 105회 분량이었다.
“중간에 동료 기자마저 회사를 그만두면서 한경면에서부턴 저 혼자 증언자들을 만났습니다. 일주일에 20~30명은 만났는데, 스트레스가 심해 머리가 하얗게 셌어요. 종교도 없는 사람이 한라산 중턱을 지나다 마치 4·3 영령을 만난 듯 머리가 쭈뼛해 최대한 열심히 취재하겠다고 약속한 적도 있습니다. 도무지 자신이 없었지만 증언자들이 생존해 있는 이 시기를 놓치면 훗날 제가 느낄 자책과 회한을 견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 시기 중요한 증언을 해주었던 사람들은 현재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4·3의 생생한 증언은 영원히 수면 아래에 잠겼을 터였다. 그는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연재가 중단된 1999년 8월, 마지막까지 4·3취재반에 남은 기자가 됐다. 그의 예감대로 4·3 작업은 그의 평생 일이 됐다.
순식간에 흘러간 30여년의 세월… 그러나 숙제는 남았다
2000년 1월 ‘4·3특별법’이 제정되고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김 전 위원은 그 해 10월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전문위원에 선임됐다. 2003년 10월 보고서가 공식 채택되고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한 이후엔 ‘희생자 심사업무’를 맡아 4·3피해자들을 위해 싸웠다. 희생자 심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09년 3월엔 보수단체들이 느닷없이 헌법소원심판, 행정소송, 국가소송 등을 제기해 ‘소송수행자’로서 법정 공방을 벌였고 결국 6건의 소송을 모두 승소했다.
보수단체들의 민원 때문이었을까, 2013년 6월 전문위원직에서 해임된 그는 현재 낮엔 농부와 목수로, 밤엔 4·3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제주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초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결과를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98년 5권에서 멈췄던 ‘4·3은 말한다’ 책도 진작 써뒀던 6권과 함께 2~3년간의 준비 후, 7권을 출판할 예정이다.
“사명감이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얼떨결에 4·3 공부를 시작한 것인데 순식간에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최근 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아직도 4·3에 붙을 올바른 이름을 찾는 일, 정명이라는 숙제가 남았습니다. 저는 제주4·3이 평화통일을 지향했기에 개인적으로 4·3을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계속 논쟁했으면 합니다. 4·3은 자꾸 호명되어야 합니다. 언론이 계속 관심을 갖고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