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그들’은 살인자였다. 부녀자를 잔인하게 강간·살인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 전과자. 이제, 그들은 ‘피해자’다. 고문 등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희생자. 지난 2월4일, 부산고등법원은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두 범인 최인철·장동익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지 30년,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한 지 28년 만이었다. 재심 준비부터 무죄 선고까지 5년간의 긴 연재를 정리하는 마지막 기사를 쓰고 송고 버튼을 누르면서 울컥한 마음으로 문상현<사진> 기자는 생각했다. “끝났구나, 나의 5년이.”
2016년 2월, 문상현 일요신문 기자는 분홍색 보따리를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전과자’가 앉아 있었다. 무기수였다가 감형받아 2013년 출소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은 진범이 아니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비슷한 사건 제보, 교도소 수감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도 여럿 받아봤던 문 기자는 먼저 “주장을 뒷받침할 기록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분홍색 보따리가 그것이었다. 장동익씨의 어머니가 2003년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변호사 사무실과 서울, 부산을 오가며 모아온 사건기록이었다.
그 뒤로 한 달을 기록만 살폈다. 한쪽에는 형사소송법과 법의학책을 펼쳐놓고서였다. “일개 기자일 뿐”이었지만, 이상한 지점이 많이 보였다. “살인사건이고 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사건인데 증거가 없었어요, 단 하나도.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이었죠.” 처음에 그들을 향했던 의심은 “과거 수사와 법원 판단에 대한 의심으로 바뀌었”고, 수사관계자나 법의학자들에게 자문할 만큼의 확신도 생겼다. 그들에게서 공통으로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이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였다. 기록을 본 박 변호사가 “억울한 사건”이라고 한 뒤에야 그는 첫 기사를 썼다. 그렇게 이 사건의 진실을 처음 알린 기사부터 무죄 판결까지, 5년간 35편의 기사를 쓰며 꾸준히 취재해온 공을 인정받아 지난 2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문 기자는 “혼자 한 게 아니라 다 같이 만들었다”며 “당사자분들, 박 변호사, 수사관계자, 사건을 널리 알린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기회를 주신 회사 모두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상경한 두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문 기자는 기자가 된 지 6개월이 막 지난 참이었다. 기자 초년생이 그의 말대로 “운명적인 사건”을 만나 좋은 결과를 냈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아쉽다”고 했다. “연차가 생기고 경험이 있을 때 시작했다면 더 좋은 기사를 쓰고 증거 수집 기간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저를 만나고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5년이 걸렸잖아요. 그 기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했다면 좋았을걸. 그래서 많이 아쉽습니다.”
무죄 판결이 났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그는 잘 안다. 형사보상과 국가배상 청구의 과정도 남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피해자와 가족들이 말로 다 못할 고통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문 기자가 무죄 선고 뒤 마지막 기사에서 그들의 상처와 함께 “회복과 치유의 시간”을 주목한 이유다. 그 과정을 회사 영상팀과 함께 다큐멘터리로도 제작 중이다.
6년 전, 막연한 동경을 품고 기자가 된 그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탐사보도의 매력에 푹 빠지는” 동시에 기자라는 일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상향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는 발판 같은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의견이나 주장들이 그냥 대립과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약속으로 합의되는 과정에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제공돼야 하고, 그 역할은 기자만이 할 수 있어요. 이상을 좇는 게 몽상가처럼 보이겠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걸 현실이 되게끔 노력하는 게 기자라고 생각합니다. 낙동강 사건 당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더 겸손하고 책임감 있는 기자가 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