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강원 춘천시 약사동 한적한 도로 옆 골목 입새,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구도심 인근 주택가, 주민을 빼면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동네에 지난달 21일 ‘첫서재’란 나무간판이 붙은 공유서재가 문을 열었다. 라일락 꽃잎이 날리는 마당을 지나 집에 들어서면 웃는 낯의 부부가 맞이한다. 지난 2월 말 육아휴직에 들어간 남형석 MBC 기자가 내년 11월까지 아내, 아이와 함께 꾸려갈 공간의 첫 인상은 이랬다. 그는 휴직 기간 서울살이를 접고 모두가 함께 춘천으로 갔다. 폐가를 인수해 온 가족이 함께 리모델링을 하고 공유서재를 열었다. 남 기자는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아이까지 회의에 참여시켜서 우리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을 가족 구성원 셋이 일궜다는 경험은 영원히 남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서재는 말대로 온 가족이 공들인 결과물이다. 공간 중 ‘글책방’은 남 기자가, ‘그림책방’은 그림책 테라피스트인 아내가 꾸몄다. 지분을 달라고 주장하던 아이는 ‘마당지기’를 맡아 지난 겨울 눈 쌓인 마당을 직접 쓸고 다녔다. 올해 춘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축구학원 하나만 다닐 뿐 한 살 어린 골목길 친구와 동네를 뛰어다닌다. “아이가 애지중지하던 달팽이 두 마리가 이사 오면서 죽었어요. 자기가 마당을 일구면서 심은 단풍나무가 있었는데 저희도 못 오게 하고 혼자 거기 묻겠대요. 봄이 되니까 아이가 ‘엄마 달팽이가 좋은 흙을 만들어줘서 잎이 많이 났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기억이 남을 거 같은 거죠.”
처음부터 서재를 열 계획은 아니었다. 춘천에 머물 생각도 아니었다. ‘그동안 모은 돈 아이 입학과 함께 1~2년 동안 다 쓰고 다시 시작하자’던 부부는 지중해에 위치한 국가 몰타에서 육아휴직 기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고민하던 차 코로나19가 터지며 계획을 수정했다. ‘40대는 작가로 살고 싶은 꿈’이 있어 ‘낮엔 글을 쓰고 저녁엔 아이를 보자’ 싶었다. 막상 꾸미고 보니 생각보다 지출이 컸고, 남의 얘길 듣지 않고 창작을 하는 건 무리다 싶어 서재를 개방하기로 했다. 단, 운영은 “돈이 아닌 다른 가치”가 목표다. 테이블은 5개뿐이고 3인 테이블은 아예 없다. 1인 2시간 기준 5000원의 비용을 받지만 누군가에게 편지를 작성해 우체통에 넣어두면 무료다. 북스테이인 ‘첫다락’은 예약을 받아 운영하는데 숙박비를 5년 뒤 돈이 아닌 걸로 받는다.
“여행을 좋아해서 많이 돌아다녔어요. 통영, 울진을 두고 고민했는데 사정상 맞지 않았고요. 춘천 이 동네를 되게 좋아했거든요. 집이 예뻐서 매물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폐가로 있는 걸 부동산에 주인 찾아달라고 해서 구했어요. ‘단독주택 세 번 지으면 사람이 죽는다’던데 리모델링이 진짜 힘들었어요. 60년 된 집이라 영하 24도가 되니까 수도가 터지고 변기가 깨지는 일도 있었고요.”
그 서재에서 부부는 가장 평범해서 특별한 하루를 보낸다. 아내는 갑자기 사장님이 됐고, 남 기자는 사장님(?)을 돕는다. 등교시킨 아이가 하교하면 집에서 간식을 챙겨 먹이고 함께 논다. 서재로 넘어와 종알종알 벤치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하루를 마무리 하는 일상. 2010년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1년 9월 MBC로 이직해 3년 간 사회부에서 일했고 뉴미디어뉴스국, 정치부 등을 거쳤다. MBC의 뉴미디어 브랜드 ‘엠빅뉴스’, 낮뉴스 ‘뉴스콘서트’를 기획했으며, 예능형 뉴스를 표방한 ‘로드맨’의 뉴스기획PD로 활약했다.
“돌아가서 기자든, PD든 일을 다시 할 텐데요. 아이템을 내든 기획하는 방식이든 이전과는 다른 기자가 되고 싶어요. 서재는 ‘지금 행복을 누리고 천천히 생각하자’ 해서 휴직 끝나면 어떡할진 생각 안하고 있고요. 10~20년 지나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할 거 같아요. 정말 안 팔고 영원히 두고 싶어요,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