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사만화 <장도리>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1995년 2월6일자 경향신문 1면에 신예 박순찬의 얼굴이 실렸다. 경향신문 시사만화가 공개채용에서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박 화백이 데뷔한 날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26살 청년의 이름 뒤에 ‘화백’이 붙은 것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날 “우리사회의 잘못된 구석구석을 찾아내겠다”는 포부처럼, 박 화백이 세상에 내놓은 장도리는 특유의 위트와 촌철살인으로 권력과 재벌을 비판해왔다. 또 여성, 청년,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고단한 현실을 풍자하면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우리사회의 희로애락을 26년간 기록해온 4컷 만화 장도리가 지난달 24일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박 화백은 “1년, 1년 보내다보니 26년이 금방이더라”며 “매일 연재하는 리듬을 유지하면서 다른 작업을 하기 쉽지 않았다. 시대와 언론 환경이 급변하면서 신문만화에 다양성을 담기 어렵다는 생각도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단했다”고 말했다.
박 화백에게 만화는 “당연히 그리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 어른이 돼도 늘 만화를 그릴 거라고 생각했다. 천문학을 전공한 대학시절에도 만화 동아리에서 만화를 그렸다.
‘만화 삼국지’ 같은 극화 작가를 꿈꿔온 그에게 신문에 4컷을 싣는 시사만화가는 예상치 못한 길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지원한 경향신문 시사만화가 공개채용에 덜컥 합격했다. 그의 기억으로 200~300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박 화백은 ‘신세대 감각이 뛰어나고 세필화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시사만화의 생명인 촌철살인의 대사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론사 위상이 피크였던 시기였어요. 전임 노태우 정권부터 대통령 얼굴을 만화로 그릴 수 있게 되면서 시사만화의 대중적 인기도 폭발적으로 늘었죠. 장도리는 못을 박고 빼내는 공구인데, 그땐 다들 집에 하나씩 있었거든요. 흔하고 편히 부를 수 있는 이름 장도리를 캐릭터로 만들어 네 컷 만화를 시작했습니다.”
입사 초반엔 펜대에 잉크를 찍어 만화를 그리고 국장에게 결재를 받았다. 경향신문이 한화그룹 소유이던 당시 민감한 내용은 수정됐다. ‘재벌’, ‘좌파’ 같은 단어도 쓸 수 없었다. 1998년 이후 경향신문이 사원주주회사로 자리 잡고 정치사회 환경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박 화백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나갔다. 친근한 그림체와 특유의 재치, 신랄한 비판의 조화로 큰 호응을 얻었다. 소위 ‘뼈 때리는’ 만화로 SNS나 커뮤니티에 공유되곤 했다.
그 중에서도 2012년 그린 <산업화와 88만원 세대>는 박 화백 스스로 손에 꼽는 작품이다. 2012년 대선에서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당시 여야) 간 정쟁에 볼모로 붙잡힌 청년세대의 애환을 네 컷에 녹여냈다. ‘속 타는 데 물이 없다’는 양 세대와 큼지막한 물통을 지고 가는 청년세대가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해 전국시사만화협회 ‘올해의 시사만화상’을 수상했다.
장도리 26년 역사를 마감한 박 화백의 퇴장에 아쉬운 목소리가 많다. 특히 시사만화가 중에서도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인 데다 그가 연재한 신문 4컷 만화는 명맥이 위태롭다. 이제 주요 신문사에서는 매일경제신문 양만금 화백의 <아이디>가 유일하다.
박 화백은 “시대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4컷 만화는 까다로운 장르다. 4컷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웹툰으로 가지 왜 신문에 오겠느냐”고 했다. 다만 그는 시사만화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 만화만 시사이슈를 다룬다’는 고정관념을 깨야한다는 것이다.
“신문의 특성이 남녀노소가 함께 본다는 건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정치사회 문제잖아요. 옛날 신문 만화는 정치 이슈를 다루지 않고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지금으로 치면 조회수가 올라가니까 그쪽을 많이 다루게 된 거예요. 그러다보니 신문을 제외한 다른 만화는 허무맹랑한 내용만 다룬다는 인식이 굳어졌어요. 만화의 본질은 풍자와 새로움 추구라고 생각해요. 웹툰이 정치사회 이슈를 다룬다고 비난하는 건 일종의 탄압이죠.”
박 화백은 신문을 떠나 넓은 세상을 마주했다. 더는 지면 편집에 맞게 짜여진 4컷에 갇혀있지 않아도 된다. 현재는 다양한 인물을 그려오며 쌓은 노하우를 풀어낸 ‘캐리커처 교본’ 발간을 준비 중이다. 그는 장도리가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되길 바라고 있다.
“새롭게 진행 중인 작업만으로도 벅찰 만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만화를 포함해 모든 콘텐츠가 디지털로 유통되는 시대에 옛날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경향신문에선 장도리 연재를 마쳤지만 다음에 또 어딘가에서 다른 형식의 장도리로 독자들을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