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는 개미가, 돈방석은 대주주가… 국내 IPO 씁쓸한 단상

[이슈 인사이드 | 금융·증권] 이혜진 서울경제신문 차장

이혜진 서울경제신문 차장

“한국의 주식시장이 학대당하고 있다.”


최근 이원기 PCA자산운용 대표가 한 유튜브 채널에 나와 현 상황에 대해 일침을 놨다. 저금리에 못 견딘 개인들이 증시로 몰려들자 기업, 기관투자자들이 그동안 못했던 숙원 사업들을 풀어내며 주식 공급을 쏟아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더기 기업공개(IPO)다. IPO는 그동안 최대주주나 일부 기관투자자들만 갖고 있던 회사의 주식을 거래소에 상장해 불특정 다수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으는 행위다. 좋은 기업들이 거래소에 상장해 누구나 그 기업의 주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게 주식시장의 장점이다.


그러나 국내 IPO의 양상은 이와 다르다. 기업들이 알짜 사업부를 떼어내 이를 다시 상장하는 쪼개기 상장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앙꼬’가 빠진 기존 회사의 주가는 급락할 수 밖에 없고 주주들은 주가 하락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카오다. 카카오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뭇매를 맞고 있지만 증시에서도 이 못지않은 문어발식 상장을 추진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창업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계열회사의 CEO로 기용한 ‘김범수 키즈’들은 수백억씩 돈방석에 앉았거나 앉을 예정이다. 정작 카카오 ‘본체’를 들고 있던 소액주주들은 ‘공동체’ 회사들이 상장될 때마다 본체 가치의 하락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LG화학, SK이노베이션도 배터리 사업부의 분사 및 별도 상장 예고로 주가가 몸살을 앓았고, 만도도 자율주행관련 사업부 분할을 발표하면서 하락을 면치 못했다. 현대중공업지주(지주사)와 한국조선해양(중간지주사)이 모두 상장돼 있는 상황에서 현대중공업까지 겹치기 상장을 하면서 기존 회사들의 주가는 하락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대주주들은 지분율의 희석 없이 증시에서 자금조달에 성공할 수 있었다. 미국과 같은 선진 증시에서는 기존 주주와 신규 상장 자회사 주주 간 이해 충돌 문제 때문에 대개 모회사 한 곳만 상장한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대주주만 극단적으로 누리는 것도 국내 증시가 극히 소수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또 다른 사례다. 최근 한샘의 창업주 일가가 자신들의 지분 약 30%를 사모펀드에 매각했다. 주가 대비 약 40%의 웃돈을 얹어 팔았다. 정용진 신세계 그룹 부회장은 최근 광주신세계 지분 52%를 약 20%의 프리미엄을 받고 넘겼다. 이 과정에서 한샘 주식 70%, 광주신세계 지분 48%를 가진 소액주주들은 ‘그들만의 잔치’를 씁쓸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주가는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존 대주주와 차기 대주주는 기업이 상장돼 있는 덕택에 지분 100%를 소유하지 않아도 경영권 프리미엄을 한껏 누릴 수 있는 구조다. 해외에서는 M&A시 소액주주가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일은 벌어지기 힘들다. ‘모든’ 주주의 이익을 동등하게 보호하기 위한 의무공개매수제나 이사회의 견제 등과 같은 제도적인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저력은 역동적인 자본시장에서 나온다. 미국 기업들이 혁신을 주도하고 강대국을 떠받치는 기둥이 될 수 있던 이유는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가능케 한 미국의 주식시장 덕택이다. 한국의 자본시장이 지금처럼 학대당한다면, 1000만명이 넘는 개인투자자들은 국내 시장을 외면하고 선진 시장으로 손쉽게 넘어갈 준비가 돼 있다. 마치 공유지의 비극처럼 자신의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하면 황폐해진 자본시장만 남게 된다. 그곳에서 과연 기업의 혁신과 경제의 역동성이 꽃 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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