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달리 말끔한 양복차림으로 회사에 나가려니 어색했다. 아내와 두 딸, 외손주까지 동행했으니 더 그랬는지 모른다. 공덕동 사옥이 눈에 들어오자 꽃다운 시절이 쏜살같이 지나갔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마음은 스물대여섯의 청춘인데, 그새 예순의 나이를 넘겼다니 믿기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김이택<사진 가운데> 한겨레신문 대기자의 정년퇴임식이 열렸다. 35년 6개월의 기자생활을 정리하는 그날, 선후배들은 기꺼이 와줬다. 그는 시원섭섭하지만 아쉬움이 더 컸고, 언론계가 어려운데 혼자만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축하의 말과 함께 기념패와 감사패, 화보집 등을 건네받으니 ‘기자일 헛한 건 아니었구나’ 위로가 됐다.
그가 현역 시절에 활동하던 사진과 쓴 기사를 모아놓은 화보집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언론환경이 척박해지고 있습니다…이런 때일수록 한겨레 창간 정신을 되새기게 됩니다. 선배가 청춘을 바쳐 일군 한겨레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여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80년대 초반 서울대 법대를 다닌 그에게 사법시험은 언감생심이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요.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조금이나마 양심을 지켜보겠다고 그런 식으로 타협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무기정학, 노동현장, 산재를 당해 복학한 후 진로를 고민하다 언론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86년 5월 한국일보 기자로 들어와 88년 한겨레 창간 때 옮겨 정치부 차장, 사회부장, 부국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대기자 등을 지냈다.
35년간 기자로 일하다 보면 수많은 사건이나 인물과 여러 갈래로 얽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갖가지 사연이 구절양장 펼쳐지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에게 가장 참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세월호 참사 두 달을 맞아 당시 편집국장이던 그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캐리커처와 부모의 사연을 담은 글을 싣기 위해 경기도 안산으로 향했다. 그때, 가족대책위 회의가 열린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 안 경기도미술관 강당은 잊히지 않는다.
“참사 희생자들을 잊지 않는 게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장기 연재를 준비했어요. 협조를 얻기 위해 유족 대표를 만났는데, 유족들이 모인 강당으로 안내하더군요. 당시는 ‘전원 구조’ 오보를 시작으로 방송사 간부가 멱살을 잡힐 정도로 언론이 줄줄이 욕을 먹던 때였어요. 단상에 올라 우리 구상을 말씀드렸는데 장내가 찬물 끼얹은 듯 숙연했어요. 그 강당 분위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한겨레의 ‘잊지 않겠습니다’ 기획은 1년간 이어졌다.
기자 말년엔 유튜브 방송에 데뷔했다. 저널리즘 성찰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붙은 ‘김이택의 저널어택’으로, 그가 2001년 사건데스크를 맡아 시작한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와 맥이 닿아 있는 콘텐츠였다. 2001년 시리즈가 큰 언론사들의 전횡과 과거 왜곡 보도를 비판하는 기획물이었다면 유튜브 방송은 그들 언론의 ‘권력’적 행태가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딴 데 눈 돌리지 않고 30년 넘게 있던 언론사를 떠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빠가 30년 이상 한겨레만 보고 일하고 숨쉬고 해왔는데 앞으로 허전해하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퇴임식 날, 딸의 말이 가슴에 두고두고 얹혔다.
“실제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저만 아니고 다들 한겨레 창간 대의에 공감해서 스스로 인생을 걸고 결단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취재하고 밤새우고 했죠. 민주주의적 운영 방식이 일부 기회비용도 부담시켰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한겨레가 버티고 있는 건 집단지성으로 어려움을 극복해온 덕분이라고 봅니다. 앞으로도 후배들이 지혜를 발휘해 줄 것이라고 믿어요.”
기자 삶의 후회라면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거다. 특히 어머니가 위중한 병을 얻고 나니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그는 “뉴미디어가 대세가 되고 언론환경이 급변하고 있지만 언론에 신뢰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며 “우리 언론이 더욱 신뢰 회복에 역점을 두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