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여후, 남중여경, 남오여삼.’ 어딘가 사자성어 같은 이 말은 한국 방송 뉴스 프로그램에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3가지 규칙이었다. 풀이하자면 50대 이상의 남성과 30대 이하의 여성으로 앵커를 구성하고, 남성은 앞의 무게 있는 뉴스를, 여성은 뒤의 가벼운 뉴스를 전달한다는 뜻이 되겠다. 지난달 18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뉴스룸’엔 이 규칙을 따른 과거 KBS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규칙 아래 만들어진 KBS의 뉴스가 양과 질적으로 얼마나 편향적이었는지, 또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다큐는 꼼꼼히 짚었다.
이 다큐를 만든 사람은 이은규 KBS PD. 그는 지난해 6월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으로 여성 아카이브 시리즈를 시작한 이후 ‘다큐멘터리 윤여정’과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에 이어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이번 ‘뉴스룸’을 만들었다. 이 PD는 “개그우먼을 방송하고 나서 이런 주제와 형식이 계속 나오면 좋겠다, 또 다른 직종들도 궁금하다는 의견이 있어 시리즈로 만들게 됐다”며 “마지막 편은 결국 우리 내부적으로도 같이 공유할 법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런 차원에서 뉴스룸 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전의 다큐들이 젠더 이슈를 확장하기 위해 유명인들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뉴스룸 편은 화제성은 덜할지라도 메시지에 치중하고 싶다는 뜻이 컸다. 그런 차원에서 이 PD는 다큐의 얼굴로 영국 BBC의 서울 특파원, 로라 비커를 내세웠다. 이 PD는 “최근 백래시(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중의 반발)도 심하고 너무 이런 주제를 남녀 갈등으로 가져가서, 본질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사람들에게 정확한 언어로 전달을 하고 싶었다”며 “아무리 기자고 업계에 있다 하더라도 한국인이 말하면 어떤 장벽 같은 게 있을까봐 아예 로라 비커 같은 외부인이 얘기하도록 했다. 한국 여성들이 남성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는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하면 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 많이 기댔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큐 내용도 자연스레 외국의 혁신적인 정책들에 주목했다. 남성과 여성 외부 칼럼니스트 수를 동일하게 구성하는 뉴욕타임스 사례나 남녀 출연자 비율을 맞추는 BBC의 ‘50:50 프로젝트’ 등이 소개됐고, 미국 상위 언론사 20곳 중 12곳을 여성과 유색인이 이끌고 있다는 통계 등도 주요하게 제시됐다. 특파원과 프리랜서의 도움을 받아 그러한 정책을 실제로 추진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 PD는 “기자협회나 언론재단에서 했던 컨퍼런스 보고서를 참고하면서 국내에서도 (업계) 고민이 깊구나 생각을 많이 했다”며 “지난 9월 KBS 뉴스9에서 여성 기자가 보도한 비율이 45.9%였는데 공영방송이라 그런지 성별을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구나, 알게 되기도 했다. 다만 보도국 밖의 시선에서 보면 아직도 경력 단절 이후 중·장년 여성 기자들의 모습이 부족해 아쉽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도, 다큐 내에서도 이 PD가 강조했던 건 그래서 “형식의 변화 자체가 메시지일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이 온전히 뚫고 나가기엔 어려움이 있으니 조직 차원에서 여러 정책과 변화를 마련해줘야 한단 뜻이다. 이 PD는 “내부적으로 이번 다큐 시사를 하면서 그럼 다큐 인사이트 출연자 성별 비율부터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얘기가 나오긴 했다”며 “여성 PD들끼리 스터디 할 때도 BBC 드라마의 인구 구성이 다양한데 이걸 연구하고 한 번 우리도 해보자 말이 나온 적이 있다. 다만 현업에 치여서 정말 그런 프로젝트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순진무구한 마음으로만 이번 다큐를 만들었다”고 했다.
다큐가 말했던 모두의 뉴스, 다양한 뉴스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소수자들을 약자나 시혜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반영하자”는 것이다. 이 PD는 “그냥 존재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미디어에 옮기는 행위에 어떤 시혜적인 시각이 들어갈 필욘 없는 것 같다”며 “그런 생각의 전환이 자연스럽고 미래 지향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