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포장된 대통령의 무지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한국에서 대선 열기가 잦아들 무렵 브라질에서는 본격적으로 대선 정국이 전개된다. 주요 대선주자들이 3월 중 러닝메이트를 확정하면서 속속 출마를 선언할 예정이다. 투표일까지 7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대선주자들의 물밑 움직임은 이미 활발하다.


2018년 브라질 대선에서는 ‘극우 돌풍’이 불었다. 권력형 부패 스캔들과 치안불안, 경제위기 등이 겹치면서 13년간 계속된 좌파 노동자당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됐던 ‘좌파 아이콘’ 룰라 전 대통령은 부패 정치인으로 몰려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돼 손발이 묶였고, 대타로 내세운 젊은 후보는 흐름을 뒤집지 못했다.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좌파 정권에 거부감을 가진 기득권 카르텔이 강력하게 작동한 데 힘입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브라질 군부독재정권(1964-1985년)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우파 대통령 보우소나루는 ‘신화’로 포장됐다.


보우소나루 정부의 출발은 그럴 듯했다. 시장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시카고학파 인사를 경제장관, 권력형 부패 수사로 유명한 전직 연방판사를 법무장관에 기용하면서 좌파 정권과 차별화를 꾀했다. 브라질을 사회주의에서 해방시키고 민주적 규범을 지키면서 부패와 범죄, 부실한 경제 운용과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좌파에 대한 지나친 증오와 독선, 권위주의적 행태를 고집하면서 보우소나루는 스스로 민심과 멀어졌다. 민주주의와 인권, 다양성의 가치는 무너졌고,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의제를 두고 국제사회와 충돌했다. 경제는 저성장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했고, 가파른 물가 상승 속에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코로나19 위기 앞에서 보인 비과학적 행태는 국제적 조롱거리가 됐으며, 사망자가 65만명에 이를 때까지도 국민에게 고개 숙이지 않으며 지탄의 대상이 됐다. 그러는 사이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20% 붕괴 직전까지 밀렸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보우소나루가 보인 모습은 그의 이미지에 치명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보우소나루는 국내외 압력과 권고를 무시하고 2월 중순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러시아를 떠나면서 “푸틴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보우소나루는 1주일 뒤 이뤄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해하지 못했다. 육군 장성 출신인 부통령이 러시아의 군사적 침략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보우소나루는 푸틴에 대해 침묵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태에 관해 발언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인 나뿐”이라며 부통령 발언을 깔아뭉갰다. 보우소나루의 무모한 행동은 미국을 자극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브라질은 우리와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며 불신을 드러냈고, 미국 국무부는 “역사적으로 평화를 강조해온 브라질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브라질 내 반응도 심상치 않다. 외교가에서는 “보우소나루가 중대한 외교적 실수를 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언론에는 “외교도 경제도 너무 모른다” “대통령의 무지 때문에 브라질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기사와 칼럼이 실리고 있다. “보우소나루는 역사적으로 뛰어난 외교 역량으로 명분과 실리를 취해온 브라질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보우소나루는 임기 초부터 지정학적 문제를 다룰 준비가 돼있지 않았으나 러시아 방문은 훨씬 더 높은 수준에서 브라질에 해롭다.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갖는 것은 브라질의 평화에 위험이다”는 게 요지다.


대선을 앞두고 이뤄지는 여론조사는 룰라 전 대통령과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양자 대결을 예고하고 있다. 룰라가 여전히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보우소나루가 지지율 격차를 조금씩 줄이면서 뒤쫓는 양상이다. 현직 프리미엄을 최대한 살리면 보우소나루가 박빙 대결 구도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보인 언행에 대해 우파 진영에서 우려가 제기되고, 시장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우소나루의 ‘신화’는 허구로 끝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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