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0일 EBS에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검찰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유시춘 EBS 이사장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압수수색은 지난 3월 국민권익위원회가 검찰에 유 이사장의 업무추진비 사적 유용과 관련해 수사를 의뢰하면서 이뤄졌다.
지난 3월4일 권익위는 유 이사장이 취임 이후 5년여 간 정육점, 백화점, 반찬 가게 등에서 1700만원어치를 법인카드로 결제한 혐의가 있다는 조사 내용을 공개했다. 주말, 공휴일에 제주도 등에서 업무추진비를 100여 차례 썼고, 언론인과 공무원에게 3만원 넘는 식사를 50여 차례 접대한 사실도 파악했다고 했다. 권익위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업무추진비 사적 유용 의혹은 검찰에 이첩했고, 청탁금지법 위반 의혹에 대해선 방송통신위원회에 행정 처분을 의뢰했다.
10일 EBS 이사장실에서 만난 유 이사장은 자신이 프로그램 출연자 섭외, 공적재원 확보 등 EBS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문제가 된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설명하면서 그는 “사실 공영방송 이사장은 감독과 심판자의 역할만 해도 되는데 저는 필드 선수로 뛰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또 유 이사장은 검찰의 EBS 압수수색에 대해 “업무추진비 건을 가지고 검찰이 제 핸드폰, 집까지 압수수색하려 한 건 결국 별건 수사를 겨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유시춘 이사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지난해 2월 보도를 통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방통위 관계자를 조사해 유 이사장의 선임 과정이 적절했는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본다고 전해졌다. 윤석열 정부 들어 유 이사장이 언급된 사안이었다.
“용산 등에서 나를 공격하거나 해임하려는 기미는 여러 번 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 때 저와 유홍준 교수 등이 ‘꽃할배 유세단’이라는 걸 만들어 문재인 후보 지원 유세를 서너 군데서 했다. 당원이 아닌 시민의 자격으로 나선 것이고, 전체 활동 시간으로 보면 한 4~5시간 했을까 싶다. EBS 이사는 당원이거나 대통령 선거 캠프에 있었던 경우 그로부터 3년이 지나야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데 제가 EBS 이사에 지원했고, 방통위가 심사를 통과시켰다고 문제 삼은 거다. 2018년 EBS 이사장 취임 직후 당시 자유한국당이 저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발했고,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 등을 제기했으나 2년 정도 지나 검찰에 의해 증거불충분 무혐의 결론이 났고, 가처분 신청도 각하됐다. 당시 방통위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뢰해 유시춘의 당적 의뢰를 했는데 나온 게 없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이걸로 또다시 문제 삼았고, 용산에서도 저와 한상혁 당시 방통위원장을 공격했다. 당시 국감 담당자에게 입증 자료를 다 보냈더니 대통령실 조사도 유야무야됐다. 정말 서글프고 비참한 건 한상혁 전 위원장과 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사람이 이시원 당시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이라는 거다. 과거 이른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담당 검사로 중징계를 받았고, 최근엔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연루돼 교체된 사람이다. 적반하장이라는 생각과 함께 처참함을 느꼈다.”
-검찰이 이사장실을 압수수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EBS 창사 이래 검찰이 처음으로 내부를 압수수색한 일이었다.
“초유의 일이다. 영장 내용 속 압수수색 목록을 보니 감사 결과 보고서, 법인카드 영수증 및 집행 내역, 이사장 일정표 등이었고, 요청하면 제가 충분히 보내줄 수 있거나 이미 홈페이지에 공개된 자료들이었다. 애초 압수수색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언을 받았는데, ‘이런 정도의 일이면 압수수색은 안 나온다, 통상 국가기구가 수사 의뢰를 하면 검찰이 경찰로 사건을 보낸다’고 하더라. 그런데 검찰이 직접 하지 않았나, 특이한 일이다. 압수수색 당시 수사관도 약간 민망해하는 분위기더라. 나한테 죄송하다고 했다.”
-검찰이 유 이사장의 자택과 휴대폰까지 압수수색하려고 했으나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왜 이런 판단을 했다고 보나.
“압수수색 영장을 보면 내 거주지와 휴대폰, 컴퓨터, 다이어리, 업무수첩, 메모지 등은 다 가위표가 그어져 있다. 법원이 이렇게 한 거다. 법원이 이러는 경우는 1%도 안 된다고 한다. 법원이 대충 보지 않고 공영방송 압수수색이라는 것을 중하게 봤을 것 같다. 업무추진비 건을 가지고 검찰이 제 휴대폰, 집까지 압수수색하려 한 건 결국 별건 수사를 겨냥했던 게 아닌가 싶다.”
-관련해 검찰 소환 조사 등 진행된 게 있나.
“기다리고 있는데 안 온다. 내가 (업무추진비를 쓰며) 만난 분들이 주로 EBS 출연자들이거나 제가 직접 읍소해 섭외를 요청 드린 분들이다. EBS는 다른 데보다 개런티(출연료)가 낮은데 그럼에도 출연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였다. 업무추진비가 문제가 되고 난 이후 20여분이 확인서도 써주셨다. 내 스스로 정당하고 떳떳하지만 확인서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받는 과정에서 큰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확인서들을 가지고 검찰에 시원하게 얘기하고 싶은데 안 불러주고 있다.”
-권익위의 조사 발표, 검찰 압수수색 이후 연 긴급 기자회견에서 “청탁금지법을 어긴 적도, 사적 유용한 적도 없다”며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는데.
“일단 권익위는 조사 당시 저를 직접 불러 물어보지도 않았고 확인도 안 했다. 조사 결과 브리핑 때도 기자들 퇴근 시간 10분 전인 오후 5시50분에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제가 반론을 하거나 대응할 시간을 안 준 거다. 저를 아웃시키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코로나19 와중 교수님 두 분이 제 요청에 개런티(출연료)도 안 받고 EBS ‘클래스e’에 이건희 컬렉션 등과 관련 10회 출연을 해주셨다. 얼마나 고맙나. 당시엔 4인 이상 모이지 못해 그분들을 제 집필실에 초청해 고기를 구워드렸다. 반찬가게, 정육점, 백화점 등에서 업무추진비 썼다는 게 그거다. 또 권익위가 업무추진비 내역을 법조계·언론계·교육계·방송계·국회 관계자 등 5개 코드로만 기계적으로 분류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기간에 EBS가 온라인 클래스를 운영했는데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려고 교사, 학부모,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많이 들어봤다. 함께 밥도 먹었는데 제가 뭉뚱그려 항목에 ‘교육계’라고 썼다. 권익위는 그걸 공직자라고 하면서 청탁금지법 위반이라고 한다. 우리는 1년에 두 번 정도 워크숍이 있고, 여러 학회 등과 세미나를 여러 차례 했다. 제주, 통영, 부산, 속초, 경주 등이었고 저도 참석했다. 토론에 참여해 주신 패널들,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는데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에도 그걸 ‘먹방 투어’했다고 하더라.”
-3월26일 방통위에서 열린 EBS 이사장 해임 관련 청문에 출석했다.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남영진 전 KBS 이사장의 경우 방통위가 청문 절차 이후 곧바로 해임안을 의결했는데, 그때와 달리 시간을 끄는 모양새다. 왜 그런다고 보나.
“그 사이 법원의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해임 무효를 법원이 인용했는데 첫 번째 근거가 ‘2인 체제 방통위의 위법성’이었다. 숙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합의제 기구인데도 지금 방통위는 대통령이 추천한 두 위원들로만 공영방송 이사 해임, YTN 소유 구조 변경 등 중요 의결을 하고 있다. 문제의 소지가 있고 충분히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 김홍일 방통위원장, 이상인 부위원장 모두 법조인 출신이기 때문에 최근 법원의 판단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민주당 언론자유특위와 22대 국회 당선인 35명이 검찰의 EBS 이사장실 압수수색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어 2인 방통위 체제를 두고 탄핵을 언급하며 엄중 경고를 내린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다.”
-EBS 내부 감사도 진행됐다. 그 결과 최기화 감사는 이사장 업무추진비 회수 조치를 요구했으나 EBS 경영진은 입증이 불명확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의신청을 냈다. 감사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나.
“가장 큰 문제점은 감사가 EBS 직원에게 적용되는 규정을 가지고 사외이사인 이사장에게 적용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경영진들이 감사 결과에 반박한 것이다. 제가 업무추진비로 제일 많이 쓴 게 30만원이고, 숙박권이라고 적어놨더라. EBS ‘한국의 둘레길’ 프로그램이 있어 출연자 교섭을 하러 제주를 간 적이 있다. ‘클린올레’라고 올레길 쓰레기를 줍는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그중에 다른 지역에서 온 아이들에게 1인당 2만5000원인 정도인 6인용, 4인용 방 도미토리 비용을 하루저녁 내준 것 같기도 하다.”
-KBS, MBC 등 공영방송 이사 해임을 강행한 정권의 다음 타깃이 이제 EBS라는 말이 나온다.
“EBS를 겨냥했다는 것 보다 개인 유시춘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다고 본다. 제가 민주화 운동 중심부에서 일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EBS에서 6년간 일하는 동안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정파적 유불리를 생각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다. 지역에 있는 학생들이 중앙 학생들과 차별받지 않고 똑같은 콘텐츠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애썼고, 양질의 콘텐츠 제공을 위한 예산 확보를 하려 정말 열심히 뛰었다. 예산 확보를 위해 EBS 관련 국회 상임위원회 의원들을 힘닿는 데까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만났다. 이후 국회의원 30여 분이 압수수색 이후 저에 대해 옹호하는 성명을 냈지 않았나.”
-그런데 보통 공영방송 이사장들이 이렇게까지 현장에서 일을 하지는 않을텐데.
“그저 내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고등학교 교사로 15년간 일했고, 지역에서 공부했던 사람이다. 지역 차별이라는 게 교육·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격차가 벌어진다고 생각해 중앙에서 서비스를 받는 콘텐츠들을 지역의 청소년들에게도 동일하게 가졌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있다. 고비용의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들의 열패감을 현장에서 체감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공영방송 이사장은 감독과 심판자의 역할만 해도 되는데 저는 필드의 선수로 뛰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온 거다.”
-앞으로 EBS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으로 보나.
“박근혜 정부 때 국정교과서 사건이 있었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겠다는 거였는데 시장에서 참패했다. 20여개 학교 중 두 학교만 신청했고 결국은 폐기 처분됐다. 그걸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만약 EBS에 대해 예를 들어 건국 전쟁과 같은 ‘콘텐츠 전쟁’을 하려고 했다면 오산이다. EBS는 콘텐츠의 제작과 편성의 독립성, 자율성은 100% 보장되어 있다.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신들과 같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임명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목적이 콘텐츠에 대한 욕심이라면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가 시장에서 어떻게 참패를 했는지 상기했으면 한다.”
-윤석열 정부 이후 그동안 공영방송사들 위기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번 정권이 언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본성이 검찰 정권이다. 검찰이 하는 일이 뭔가. 약자인 피의자를 밀실에 가둬놓고 자기가 의도한 바를 관철하는 행위이지 않나. 그 검찰의 시각과 태도, 실행패턴 등이 그대로 견지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EBS 내부는 김성동 부사장 임명 건으로도 한동안 시끄러웠다. 부사장의 과거 이력으로 노조에선 출근 저지를 벌였다. 부사장 임명 건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나.
“EBS는 법상 사장이 부사장을 임명한다. 형식적, 내용적으로 부사장 임명에 문제가 없던 건 단 한 번이다. 문재인 정부 때 당시 김명중 사장이 내부 인사인 김유열 부사장을 임명 했을 때다.”
-EBS의 경영 악화, 노조의 사장 퇴진 운동 등 EBS 경영 위기와 함께 노사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EBS 1년 예산이 3000억원 안팎인데, 공적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 1밖에 안 된다. 이것만 봐선 공영방송도 아니다. 우리가 콘텐츠, 책 등을 팔아 자체 수입으로 메워야 하는 건데 서민 경제가 악화되고 있고, EBS 교재 수능 연계 비율도 낮아지면서 여러 가지로 어렵다. 노조가 사장의 경영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물론 사장의 경영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도 있겠지만 이번 경영위기는 공적재원 지원이 취약한 시스템 리스크라고 본다. 경영진은 법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적자 규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헌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제가 목격하고 있다. 2024년도 경영 성적표는 지금 노조가 문제 삼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개선될 거라고 보고 있다. 때로는 대립하고,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노사는 공동 운명체다. 같이 탑승하고 있는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함께 이 배를 구조해야 하는 공동운명체라는 인식을 해줬으면 좋겠고, EBS 노사는 그렇게 할 거다."
-임기가 4개월 정도 남았다. 지난 6년간 이사장으로서 EBS에 어떤 도움이 되고 싶었나.
“임기 내에 꼭 해결하고 싶었던 건 TV 수신료 중 EBS가 70원만 받는다는 이 불합리한 공적 재원의 취약성이다.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열심히 뛰었다. 국회의원, 학자, 시민단체 등을 만나 세미나를 열었고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알려졌다. 이사장 해외연수비를 자진 반납해 그 비용으로 ‘수신료 정상화 추진단’을 한시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에 EBS가 받는 수신료 금액을 인상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23대 국회가 개원하면 다시 막 찾아다닐 생각이다. 또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첫 예산 딸 때는 기획재정부에 두 번 쳐들어가기도 했다. 그냥 가서 무작정 기다린 거다. 결국 예산 110억원을 따냈는데 지난 7기 경영진(김명중 당시 사장)과 노조는 그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자원빈국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성취를 한꺼번에 거머쥔 건 부모님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우리를 교육시킨 힘 때문이다. 그 공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EBS인데 70원 주는 게 말이 되나. 임기가 끝나더라도 이 일에는 온 힘을 쏟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