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이 장애인들의 시위 속에 운행을 중단하는 일이 잦아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대한 요구가 해소되지 못하고 사회적 염증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갈등과 분열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사건에 언론은 올바르지 못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 코너에 장애인을 세우고 홍 코너에는 정치인, 비장애인, 서울교통공사를 번갈아 세워 갈등만 더 극적으로 중계하는 방식으로 언론은 본질을 누락하고 있다. 시위의 동기와 요구 사항, 그리고 시위를 ‘진짜’ 멈출 수 있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현실적인 논의나 그 가능성과 진행 상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장애인들이 장애인 이동권을 두고 벌인 시위는 최근에 촉발된 게 아니다. 2001년 지하철역에서 리프트를 이용하다 장애인이 사망한 사고를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지하철역에서 장애인 5명이 사망하고 12명이 크게 다치는 와중에 이어져 온 시위였고, 작년 말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부정당한 기나긴 역사성과 결국 지하철이 멈춰 세워진 것엔 언론의 책임도 있다.
해외에서도 시위로 러시아워 지하철이 멈췄던 일이 있었다. 2019년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이 영국 정부에 극심한 기후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면서 런던 중심부 지하철역에서 열차 지붕에 올라가 운행을 중단시켰다. 당시 현지 언론 역시 시위의 구체적인 방식, 분노한 통근자들의 반응, 시위자들을 끌어내면서 발생한 물리적 충돌에 집중했다. 영국 언론은 기후위기 대응 의식을 사회 전반에 인식하게 하고, 정부로부터 실효성 있는 기후정책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최근 멸종반란이 다시 런던 도심에 돌아와 교통을 마비시켰다. 3년 전 요구가 수용되지 못했고, 영국 사업·에너지·산업전략부가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인 화석연료 신규 개발 사업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시위 방식과 규모는 이전보다 더 다양해지고 거대해졌다. 멸종반란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시민들은 더 많아졌고, 기후위기를 과소평가하는 영국 정부에 분노하는 연대감은 커졌다. 시위자들은 런던의 주요 명소와 도로를 가득 메우며 교통을 막았다.
지하철을 막아서는 주인공들은 우리 이웃이기도 하다. 이웃들의 시위로 불특정 다수의 또 다른 이웃들이 불편을 겪는 유감스러운 일이 현재 진행 중이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현상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편을 전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그러나 언론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다.
이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손가락질받을 시위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대중들에게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다. 그리고 다시 대중교통을 막아서는 질곡의 역사를 끊을 본질적 해결책에 이르는 이정표를 사회에 제시하는 역할은 오직 언론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멈춘 지하철을 시동 걸고 다시 움직일 열쇠는 언론의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