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미류 활동가가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한 지 24일로 44일째를 맞았다. 닷새 전까지 함께 단식을 해오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이종걸 공동대표가 위급해 병원으로 이송된 뒤 “차별하지 말자는 법을 만드는데 사람이 굶다 쓰러져야 할 일입니까”라고 답답한 현실을 토로했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지 15년째 한발도 떼지 못한 데엔 정치권 못지않게 언론의 책임이 크다. 재계와 보수개신교 단체들의 반대에 부닥쳐 사회적 의제로 공론화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단식 한 달 간 차별금지법 관련 보도를 분석한 결과 보수 신문 4곳은 1~3꼭지만 지면에 실었다. 진보 신문이 30건 넘게 보도한 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 보수 언론의 문제는 차별금지법이 마치 성소수자 차별금지만을 말하는 것처럼 왜곡한다는 데 있다.
그럼 보수언론은 국민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67.2%가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일부 언론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시각으로 여론을 호도하는지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이 “절박한 심정으로 차별금지법 공청회를 조속히 개최하고, 입법 절차를 지체 없이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고 성명을 냈다.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 위원회는 2015년 인종,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금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한국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그런데 정치권의 무성의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 법안 발의 뒤 자동 폐기가 반복되며 입법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기상조라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반대하는 쪽의 논거 중 하나인데, 이런 논리라면 노예제 폐지와 여성의 시민권 보장은 역사에서 몇 십 년 후퇴했을지 모른다.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제정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은 오늘 벌어지는 차별에 눈감아도 된다는 말과 같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사회적 갈등이 커지고 있다. 차별금지를 법으로 제정하는 것만으로 피해와 갈등을 줄일 수 있
다. 누군가를 차별해도 된다는 인식에서 차별해선 안 된다는 의식의 변화는 시민들의 인권의식을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일이다. 권리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 권리를 누린다고 해서 내 권리가 침해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폭넓게 보장한다고 해서 비장애인의 이동권이 침해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늘어나면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이나 임산부 편의성이 동시에 늘어난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은 언제 비정규직으로 내몰릴지 모르는 정년을 앞둔 정규직의 문제이자, 사고를 당해 언제 장애인이 될지 모르는 비장애인의 ‘내일’을 위한 안전장치다.
현재 국회에는 차별금지법(또는 평등법) 법안 4개가 계류 중이다. 헌법이 평등권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차별이 발생하고, 구제수단이 미비해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법제정이 필요하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인종, 출신지역, 출산, 종교, 학력, 병력 등 20여 가지 부문에서 차별을 금지하도록 구체화했다. 일부 법안은 차별 시정권고를 받은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권고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시정명령 및 3000만원 이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는 조항을 담았다. 또 차별 입증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증명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오늘(25일)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법사위 소위 주최로 열린다.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해 법안 심사를 시작할 물꼬를 터달라는 게 단식농성 45일째인 미류씨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