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란 말의 허무함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지난 3일(한국 시각), 수 개월 동안 실시간 전쟁 뉴스가 자리했던 뉴욕타임스의 온라인 톱 기사 편집이 별안간 미국 국내 소식으로 바뀌었다. 여성의 임신중지를 헌법적 권리로 보장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미 연방대법원의 의견서 초안 유출 사건 여파는 그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50년 가까이 ‘절차적’으로나마 유지해온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박탈하는 움직임에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지만, 안타깝게도 트럼프 정부 이후 대법원의 보수 우위 지형이 구축된 까닭에 결론이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구태여 임신중지권에 ‘절차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미국에서조차 그것이 단 한 순간도 온전히 보장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주의를 기반으로 한 낙태 반대 단체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무력화해왔다. 각 주(州) 의회에서 낙태 규제법이 우후죽순 통과되는가 하면, 공화당 주지사의 명령으로 낙태 시술 병원이 힘 없이 폐쇄됐다. 애틀랜타의 한 낙태 시술 병원에서는 폭탄이 터졌고, 여성들을 위해 시술을 행했던 대표적인 의사 조지 틸러는 2009년 총격으로 사망했다. 지금 미국은 ‘여성의 몸’을 둘러싼 종교 전쟁터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제인 로 뒤집기(2018)’는 ‘로 대 웨이드’ 판결 뒤집기가 미국 보수 진영이 수십 년 동안 공력을 쏟아 부은 정치 기획임을 통시적으로 보여준다. 1967년 기꺼이 ‘낙태자유법’에 서명했던 캘리포니아 주지사 레이건은, 1980년 대선 과정에서 갑작스레 낙태 반대로 돌아섰다. 1970년대에 찬성 입장이던 (아버지) 부시는 대통령 재임 중 레이건보다 강경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리고 1999년 “여성들의 선택을 지지한다”던 사업가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 힐러리를 공격하며 “낙태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공화당 대통령들은 왜 돌연 입장을 바꾼 걸까.


“당시 낙태는 당파적 사안이 아니었다. 의학적 문제이자 사회 문제였다.” 뉴욕타임스에서 30년 간 연방대법원을 취재했던 법조 전문기자 린다 그린하우스는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임신중지 이슈가 시나브로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로 치환됐다는 의미다. 그 중심에는 보수 결집을 위해 새로운 의제를 발굴해내야 했던 정치 전략가들과, 정치에 무관심했던 기독교 복음주의 유권자의 표를 조직화한 종교 지도자 및 낙태 반대 단체가 있었다. ‘엄마와 아기’라는, 인류에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쟁점은 이렇게 정치적으로 ‘만들어졌다.’


궁극의 사회적 합의가 뒤집힐 정도로 정치가 망가진 세상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의 허무함을 엿본다.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이 표현은 확성기를 댄 소수의 조직된 목소리 앞에 다수가 신념을 꺼트릴 명분이 된다.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는 이들을 희생시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땔감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한다. ‘공동체의 뜻’이라는 말 뒤에 정치인들이 숨을 수 있는 핑계가 된다. 지난해 여론조사기관 갤럽에 따르면, 1989년 이래로 2021년까지 ‘로 대 웨이드’ 판결 번복에 반대하는 미국 성인의 응답 비율은 52~66%로 30여년 간 한 순간도 과반 아래로 떨어진 일이 없다. 대체 어느 것이 사회가 마땅히 채택해야 할 견해란 말인가.

그리고 똑같은 전장이 2022년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찬성 57%(한국갤럽 6일 발표, 반대 29%)라는 확실한 민심과 15년 간 꺼지지 않는 시민들의 열망에도 ‘사회적 합의’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그 법안의 이름은 바로 ‘차별금지법(평등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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