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조 투자'의 역습

[이슈 인사이드 | 경제] 김익환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익환 한국경제신문 기자

“투자계획 발표를 건너뛰면 정부에 찍힐까 걱정됩니다. 그렇다고 ‘쥐꼬리 투자’를 발표하면 민망할 수도 있는 만큼 고민이 깊습니다.”


기업들이 지난달 윤석열 정부 출범과 맞물려 ‘투자 보따리’를 줄줄이 풀고 있다. 삼성, SK, 현대차, LG, 롯데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내놓은 투자계획만 줄잡아 1000조원을 웃돈다. 5년 동안 약속한 일자리 수도 40만개를 넘어선다. 경쟁적으로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푸념을 늘어놓는 기업인들도 늘었다. 살림살이가 팍팍한 기업들은 머리를 싸매고 있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자금을 마련)’해서 투자 금액을 짜고 있다”는 기업들도 적잖았다. A그룹 회장은 직원들이 올린 투자계획을 보고 “금액이 너무 적다”며 퇴짜를 놨다고 한다. 직원들이 부랴부랴 투자 규모를 불려서 발표 계획을 다시 짜는 소동도 벌였다.


경제 성장률에 일희일비하는 경제부처와 통화정책 당국은 투자 발표를 반기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달 26일 기업 투자를 놓고 “성장률을 밀어 올리는 요인”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기업의 과감한 설비투자는 한국 경제를 견인한 원동력으로 꼽혔다. 포스코의 제철소 건설과 삼성의 반도체 투자 등은 한국의 ‘압축 성장’을 견인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최근 내놓은 투자계획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기업가 정신’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시각은 드물다. 정부 눈치를 보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계획을 내놓은 경우가 많았다.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다. 기업들이 쏟아낸 계획이 자칫 ‘투자의 저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일부 조정을 받았지만, 원자재 주식을 비롯한 모든 자산 가격이 여전히 과열 양상이다. 이른바 ‘에브리싱 랠리(everything rally)’ 시대는 이어지고 있다. 김윤 삼양그룹 회장도 지난달 30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각국의 유동성이 풀리면서 인수합병(인수·합병) 매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뜀박질했다”며 “가격 문제로 M&A 작업을 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섣부른 투자가 ‘승자의 저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의미다. 발표한 계획에 매몰된 채 투자에 나서면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부작용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기업 투자를 둘러싼 변수도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다. 금리·물가·환율이 나란히 뜀박질하고 있다. 투자금을 조달하려면 비싼 이자 비용을 내고 차입금을 조달해야 한다. 원자재·설비 도입 비용도 예년을 큰 폭 웃도는 만큼 비용 압박도 상당하다. 늘어난 이자 비용과 비싸게 들여온 설비가 기업을 옥죌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과잉 투자는 기업과 한국 경제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한때 재계 서열 7위까지 올랐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대한통운·대우건설을 인수한 금호그룹은 인수자금 상환 압박에 시달리다 공중분해됐다. 태양광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극동건설을 인수한 웅진그룹은 태양광·건설 경기가 꺾이자 2012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STX그룹, 동양그룹을 비롯해 비슷한 사례도 적잖다.


대규모 투자는 종종 기업의 명운을 가른다. 그만큼 냉정하고 차가운 계산이 뒷받침돼야 한다. 필요에 따라 투자 규모를 조정하거나 접어야 할 때도 있다. 눈치 보기식 투자는 피해야 한다. 정부도 투자 변수인 금리·물가·환율의 변동 폭을 줄이는 정책을 펴야 한다. 여기에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도 손질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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