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전쟁이 터져 청년들이 군에 입대한다. 전쟁통에 포로로 잡힌다. 북에 끌려가 40~50년을 산다. 탈북을 해 남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귀환 국군포로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유명 소설 첫 구절처럼 역사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떠났던 청년들이 돌아왔다. 살아남았으니 된 걸까. 이 노인들의 생을 몇 줄의 문장으로 적는 건 가능한가. 아니 그건 온당한 일일까. 6·25전쟁 귀환 국군포로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는 이 납작한 서술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으로 보인다.
10년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책으로 엮은 출판사 깊은바다돌고래 이혜민 대표(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는 서문에 이렇게 적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을 잘 정리해 알리겠다는) 어르신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졌다. (중략) 도리어 그 약속을 어기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중략) 한 인간으로서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을 뿐이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잘 기록하겠다”는 책임, 의무감이 쓰는 이로서 욕심을 압도한 ‘구술집’이 나왔다. 대략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 중 현재 국내 생존자는 12명, 이중 11명을 만나 9명 이야기를 옮겼다. 언제 어떻게 북에 끌려갔고, 무엇을 하고 살았으며, 왜 탈출했는지 같은 생애사적 질문을 묻고 구술을 통째로 담은 기록. 중간중간 인터뷰이의 행동, 현장 상황, 저자 감상을 담은 설명글이 최소로 들어갔을 뿐 스토리텔러의 욕망은 배제한 구성이다. 그는 지난 10일 본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문답형식조차 작위적이고 가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영논리로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커서 제 시각이 아니라 이 분들 목소리만 들려주고 싶었다. 교열 과정에서 ‘참혹한 얘기가 많고 안 읽힌다’는 의견이 나와 설명글 정도만 넣었다”고 말했다.
책엔 한재복, 국군포로 A·B·D, 고 국군포로 C, 유영복, 이대봉, 최기호, 김성태 등이 이름을 적은 자필, 몇 장의 사진, 생애가 적혔다. 북한 내무성 건설대, 교화소, 인민군에서 탄광·목공·공장·농업 노동자로 살아온 인생사는 개별적이지만 ‘북에서 청춘을 다 보낸 게 억울하다’, ‘13년 간 이 한번을 못 닦았다’, ‘북에 있는 아들을 못 만나 슬프다’, ‘죽더라도 고향을 가야겠다’ 같은 심정은 역사에 휩쓸린 누군가의 자식, 부모의 이야기론 보편적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가 북에 끌려갔지만 결국 스스로 ‘탈북’을 해 남으로 돌아온 이들로선 책 제목인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역시 이데올로기적 발언이 아니라 그런 일을 겪은 인간이 느낄 당연한 감정이다.
“기자 10명이 일주일이면 할 일을 기자 1명이 10년 간 해서” 나온 책은 이야기를 놓지 못했던 저자를 전제한다. 1982년생 전직 기자는 한겨레 인턴을 거쳐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신동아·주간동아에서 일했고 2019년 퇴사했다. 기자 시절 난민, 동성애자, 범죄자, 중독자 등 마이너리티를 다뤄왔고, 2012년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위안부 등 취재를 위해 사할린, 사이판, 팔라우를 헤맸다. 2013년 처음 국군포로 인터뷰를 했고, 연재 제안을 했지만 수용되지 못하며 대학원에 진학해 논문을 쓰기로 한다. 육아와 밥벌이 굴레 안에서 작업은 더뎠고 아예 자포자기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회사 일로 ‘군함도’를 우연히 취재하게 됐고, 평생 위안부·조선인 강제동원을 취재해 온 일본 저널리스트들과 만남에서 자극을 받아 2018년 <기록되지 않은 기억 군함도> 책도 쓴다. 이로써 국군포로 취재기회가 생길 줄 알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져 회사를 관뒀고, 회복 후 대학원 졸업논문을 쓴 게 책 토대가 됐다. 마침 방일영 문화재단 지원대상으로 선정돼 추가 취재와 마감을 했지만 상업성이 없는 책 성격상 계약을 못했고, 지원금으로 출판사를 차려 제작비를 떠안고 책을 낸 게 현재다.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과거사 취재를 하며 “피해자 대부분이 사망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 “당사자를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실감했고, “살아 계실 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제가 후회할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 “군에 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아들을 둔 엄마로서 그 마음을 잊을 수 없었다”는 감정과 동경하는 저널리스트들을 “흉내 내고 싶었다”는 열망까지, 어떤 계기는 소낙비가 아니라 가랑비처럼 와서 마음에 박힌다는 말 외에 명확한 이유를 말하긴 어렵다. 다만 이 뒤엉킨 동기로 인한 한 기록자의 실행으로 우리가 망각에 맞설 조각 하나를 더 갖게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슬픈 얘길 듣다보니 잘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자식, 친구도 없이 한 달에 한두 번 상점 가는 게 소일인 분들을 보면 가슴도 아프고요. 그래도 책을 내고 두 분께 인사를 드렸더니 전날 시킨 치킨도 꺼내주시고 검은 봉지에 복숭아와 참외 5알씩 담아주시면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뿌듯했어요. 당장은 좀 ‘현타’가 온 시기 같은데 돌보지 못한 전쟁 피해자를 계속 다루고 싶고 동력도 얻고 싶습니다. 아무도 안 나서는 문제에 제가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