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현금 100조원'

[이슈 인사이드 | 경제] 김익환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익환 한국경제신문 기자

지난 10월5일 경남 의령군을 찾았다. 이곳은 황금 들판의 벼 이삭들이 가을바람에 일렁였다. 의령군 한복판에 삼성 이병철 창업 회장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천석지기 부농’인 부친에게서 300석의 쌀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의령 쌀이 삼성그룹의 종잣돈이 됐다.


이 회장은 실패를 여러 번 경험했다. 1937년 중·일 전쟁,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사업을 접었다. 그는 이어진 실패에도 부친과 주변의 도움 덕분에 재기에 성공했다. 만석지기·천석지기 가문 출신은 많았다. 하지만 그처럼 산업 흐름을 꿰뚫고 과감한 투자를 이어간 사람은 드물었다.


삼성은 수시로 위기에 직면했다. 최근 회사 위기도 어느 때보다 팍팍하다. 실적만 봐도 명확하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동기보다 77.9% 감소한 2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도체 부문에서만 올해 누적(1~9월)으로 10조원 넘는 손실을 봤다.


사업을 하나씩 뜯어보면 위기의 징후는 한층 뚜렷해진다. 삼성전자는 크게 반도체(DS부문)와 모바일(MX사업부), 가전(VD·CE사업부)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사업부의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다. 메모리(데이터를 저장하는 반도체) 사업은 ‘만년 2위’ SK하이닉스와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들어가는 최첨단 메모리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선 정상 자리를 내줬다. 요즘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는 HBM 시장점유율 1위는 SK하이닉스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도 세계 1위인 TSMC와의 점유율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가전 사업은 더 심각하다.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 등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중국 가전업체인 하이얼, TCL, 하이센스 등은 저가 제품을 앞세워 삼성전자의 텃밭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다. 고급 가전제품 부문도 LG전자에 밀리고 있다. 덩달아 가전을 담당하는 VD·CE사업부 실적도 쪼그라들고 있다. 2020년 7조4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지난해에는 2조2000억원으로 줄었다. 올해도 부진한 실적을 이어갈 전망이다. 그나마 스마트폰 사업은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과 중국 저가폰의 협공에 위협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겉으론 위기를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인사철을 앞둔 예민한 시기인 만큼 입조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뒤로는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이 사업은 접어야 한다”거나 “저 사업은 매각도 못 하고 고민이 크다”는 등의 발언이 내부에서 오간다. 한국의 수출과 투자를 담당하는 삼성의 위기는 한국 경제의 위기로 직결된다.


삼성이 믿는 것은 그동안 벌어놓은 넉넉한 현금이다. 올 6월 말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성자산(현금+단기금융자산 등)은 97조1252억원이다. 100조원에 육박하는 현금을 바탕으로 투자를 진행해 사업 우위를 다시 점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넘치는 현금에 방심할 때는 아니다. 일본 도시바를 비롯한 ‘만석지기 기업’도 순식간에 망하는 시대다. 여기에 삼성의 현금 고갈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빠르다. 올들어 6월 말까지 현금이 20조원 가까이 빠져나갔다.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한 삼성이 이번 고비를 어떻게 넘길지 주목된다. 과거에 위기를 극복한 사례처럼 현금을 적확하고 요긴하게 사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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