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월지서 발견된 고려 기와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년)에 나오는 통일신라 인공 연못 월지에 대한 기록이다. 신라 별궁 터인 동궁과 월지는 국빈을 맞이하거나 연회를 베풀 때 사용됐다. 1976년까지 진행된 월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당대 유물만 3만3000여 점에 달한다.


월지에서 나온 주령구(주사위)에는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 ‘소리 없이 춤추기’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놀이와 함께 풍류를 즐기던 신라 사람들의 여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935년 멸망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월지도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조선 시대에는 월지가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리면서 별궁의 화려함도 잊혀졌다. 멸망한 국가의 궁궐은 철저히 부숴버린다는 통념에 따라 통일신라 멸망과 함께 월지가 폐허가 됐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동궁과 월지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경주박물관은 최근 ‘월지 프로젝트’를 통해 이런 정설을 뒤흔들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다. 월지 프로젝트는 월지 출토 유물 전부를 2032년까지 재조사해 월지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월지 유물은 발굴조사 기간이 2년으로 짧아 박물관에 전시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연구 없이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 ‘옥간요(玉看窯)’가 새겨진 기와 1점, 평평한 면에 원형 돌기 모양을 새긴 일휘문(日輝文) 수막새 8점, 국화무늬 수막새 200점 등이 발견됐다. 옥간요 기와와 일휘문 수막새는 각각 10세기 후반, 11세기 이후 등장하는 고려 기와다. 국화무늬 수막새 역시 박물관에서는 고려시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이현태 학예연구사는 “외부 학자와의 협업을 통해 기와 제작 시기를 정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시대 기와로 추정되는 일휘문(日輝文) 수막새.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200점이 넘는 기와가 고려 시대 제작품으로 확정되면 고려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월지 일부 건물이 기와 개·보수를 거쳐 고려 이후까지 존속됐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는 “신라 경순왕은 대세가 기울자 고려 왕건에게 스스로 나라를 바친 만큼 고려 입장에서 인위적으로 신라 별궁을 파괴할 이유가 적다”며 “월지 인근 건물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남기고 별장 등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기와학회장)도 “월지 내에서 고려 기와가 비교적 많은 수량이 나온 것으로 보아 박물관 가설이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월지 유물이 통일신라 시대 이전에 제작됐다는 기존의 학설을 재검토할 필요도 생겼다. 예를 들어 월지에서 나온 청동거울 2점은 중국 요나라 무덤에서 나온 거울과 유사하다. 청동거울이 출토된 요나라 무덤은 통일신라가 멸망한 뒤 60, 70년이 지난 11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월지 청동거울도 그 시기 제작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나 월지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통일신라 유물로 분류됐다.


지금까지 우리는 월지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인 통일신라를 중심으로 월지를 연구해 왔다. 그러나 역사의 종합성을 고려할 때 신라 멸망 이후에도 월지가 어떻게 활용돼왔는지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화려하지만 우리와 동떨어진 ‘섬’으로서의 신라가 아닌 현대와의 연속성을 가진 신라 연구를 위해서다. 수장고 속 낡은 유물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풀기 위한 월지 프로젝트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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