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동아일보에서 힘센 사람들에 들려 나온 지도 50년 가까이 되니 기억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니 그냥 편하게 내가 왜 동아에서 자유언론운동에 참여하게 됐는지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입사 면접시험에서 사장님이 물었다. 왜 동아일보에 들어오고 싶은가? 취직을 해야 돼서요. 그래? 돈이 필요하거든요. 뭐 이 비슷한 말이 오갔다. 나중에 회사 다닐 때 어느 선배는 ‘노인의 지혜’라는 표현을 동원해 사장님의 판단력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나를 설득하려 든 적이 있었다. 사실 그 작은 몸집의 무서운 분은 지혜와 꾀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분은 내 대답에 좀 실망하셨을 것 같기도 하다. 사장님은 월급이 많지 않다고 말했고, 나는 월급이 적어도 괜찮다고 했다. 이어진 질문. 교열기자도 괜찮나? 나는 사실 취직하기 위해서 뿐만은 아니고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동아에서 일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면 다른 신문사에서 그런 기회를 찾겠다고 했다.
아마 내 입사 시험 성적이 영 시원치 않았나 보다. 그때 나는 아직 제대 전의 사병 신분이라 시험 점수가 형편없었을 수도 있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교열기자에 대한 편견 같은 건 없었지만 글자들과 씨름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또 민주니 자유니 언론의 사명이니 하는 건 그 당시 내게 중요한 어휘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조국의 운명에 관한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들끓던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면서도 데모 한 번 안 할 정도로 내 세계에 매몰돼 살았다. 그런 내가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에, 그 대열에 선뜻 들어선 건, 그러니까 설명이 필요하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면접 이야기를 조금 더하자. 그때 사장님 말고 천관우 주필의 면접도 있었다. 그분은 나한테 막걸리를 잘하느냐고 물었다. 내 인상이 막걸리 타입으로 보였나 보다. 나는 주량은 시원찮으나 친구들과 술 한 잔 놓고 담소하는 건 아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다. 우람찬 체격에 호주가(好酒家)로 소문난 그분은 껄껄 웃으셨다. 나는 나중에 이 답변 덕택에 합격이 된 것 같다고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1년 동안 수습기자 생활을 한 후에 근무하고 싶은 부서 세 곳을 써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회부를 1지망으로, 그다음 외신부, 체육부를 적어 제출했다. 회사는 나중에 나를 편집부로 발령냈다. 내 희망대로 된 건 아니었지만 내근하며 동기생들, 선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어느새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 특히 언론의 비참한 현실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국에서 편한 자세로 쉬고 있는데 누군가 회사 앞에 데모대가 나타났다고 외쳐 다들 우르르 창가로 달려갔다. 편집국은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누런 색 5층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창밖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는데, 고려대 학생들이었던가, 백여 명쯤이 폭력정권 치하에 잔뜩 움츠러든 동아일보를 향해 모진 질타의 외침을 퍼붓고 있었다. 시위대를 포위하고 있던 경찰이 어느 순간 일제히 학생들에게 돌진해 몽둥이로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고 책가방이니 신발 같은 것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내동댕이쳐 있었다.
참담했다. 나는 편집부 내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잘못은 내가 했는데 매는 어린 학생들이 맞아야 하는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그러다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만두더라도 누군가 내 자리에서 일해야 할 게 아닌가? 도망치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는가? 하여튼 결론은 견뎌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 뒤 내 생각이나 행동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노조 결성 때는 해임되기도 했다. 진실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라는 법의 보호를 받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었지만, 언론 자유를 끔찍이 싫어하고 두려워한 정권이 이를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경영진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노조를 결성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기자들 여러 명이 이제는 고인이 된 김두식 형네 집에 모여 밤샘 토론을 벌였다. 나는 노조 결성에 적극 찬성했다. 노조 설립 신고 이후 회사는 대뜸 노조 간부 모두를 해임했고 잇따라 조직된 기자들의 대책위원회 멤버들도 사정없이 내쳤다,
편집부에서 몇 년 근무한 뒤 정치부로 옮겨 이런 일이 있던 당시 문화공보부 출입기자였던 내게 장관이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는 회사와 기자들이 한 발씩 뒤로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렇게 원상회복을 하자고 했다. 나는 노조의 공식 대표는 아니었지만, 그런 타협을 거부한다는 노조의 입장을 웃으면서 전달했다. 언론노조 같은 수상한 저항 조직에 대해 정권이 관계부처를 동원해 해체를 기도하는 것쯤 당연시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노조는 그 후 1년 동안 동아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자유언론 투쟁에서 핵심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조학래 지부장의 냉철한 리더십이 혼란한 상황을 흔들림 없이 헤쳐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원칙에 충실하고 절도 있는 투쟁은, 하시라도 무슨 명분으로라도 개입하려고 호시탐탐 노렸던 신문사 경영진이나 정치권력에 대처하는데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만 회사를 폭력적으로 쫓겨나온 뒤 여러 해가 지나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일 노조가 없었다면 동아일보의 경영진이나 투쟁에 소극적이었던 기자들도 다르게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동아 내부에서 경영진과 기자들이 맞서는 대신 이 모든 사태의 근본 원인이었던 독재 정권과 자유언론 세력이 직접 대결하는 좀 더 선명한 투쟁 판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때 반독재 전선에서 앞장을 섰던 동아일보가 후에 조·중·동의 끄트머리에 달라붙는 대신 좀 더 명예로운 선택을 하진 않았을까?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쉽게 판단이 안 선다.
1975년. 그동안 시답지 않은 정치면 기사들을 써오던 나는 동아일보가 결국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자유언론 투쟁의 중심에 섰던 기자들을 대거 해고하면서 벌어진 집단적인 투쟁에서 2층 공무국의 요새화한 단식농성장을 선택했다. 편집부에서 일했던 익숙함 때문이었던 같다.
결국 우리는 어느 새벽에 폭력적으로 쫓겨났고 즉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해 조직적인 항거를 계속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건 동아일보 사옥 앞에 매일 아침 길게 도열해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정리한 유인물들을 건네던 일이다. 유신 치하의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항의가 여러 달 동안 계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나는 2년 반 동안 실업자 비슷한 세월을 보내다 국제경제연구원이라는 데를 들어갔다. 여기서 ‘실업자 비슷한’, 이라는 표현을 쓴 건 동아투위 선배 한 분이 종각 근처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동생분의 공간 한구석을 잘라 번역실이라는 걸 차렸고 거기 여러 명이 모여 그럭저럭 밥벌이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시국선언인가에 서명해 이른바 남산(중앙정보부) 구경을 한 것 빼고는 나로서는 무덤덤하게 보내던 나날이었다.
나는 아내가 학교 교사였던 덕분에 생활 걱정은 없었다. 실업자 기간이 2년을 넘기자 아내도 힘들었겠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모처럼 얄궂은 직장을 하나 잡게 되었을 때 아내는 기뻐했는데 내 주위를 안개처럼 둘러쌌던 감시의 눈에 걸려 그나마 취직이 무산되자 끝내 눈물을 보였다. 힘든 상황이 기약 없이 길어지는 동안 한결같이 꿋꿋하던, 잔소리 한번 없었던 아내였기 때문에 나도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취직 기회가 왔을 때 정중하게 사양했던, 경제기획원 산하의 연구소에 또다시 취직 기회가 오자 이번엔 고마운 마음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우리는 인천 변두리 부개동이라는 곳에 넓게 펼쳐진 보리밭 옆에 일렬로 세워진 국민주택 중 한 채에 살았다. 아내 얘기를 한마디 더 붙이자면 이 시절의 신산한 삶을 ‘박씨 시절’이라는 한 편의 수필로 써냈고 나중에 수필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나는 동아일보에서 해임되면서 직장예비군에서 지역예비군으로 신분이 바뀌었는데 우리 동네 벽돌공장에서 일하던 분이 내 분대장이었다. 예비군 동원 훈련이 있는 날이면 이분이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박씨! 박씨!”하고 불러냈는데 이게 아내한테는 좀 서러운 경험이었나 보다.
이렇게 ‘박씨 시절’을 거쳐 나는 다시 명함을 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신문사를 같이 나온 백여 명의 선배, 동료들 가운데 나는 미안할 정도로 편한 나날을 보낸 셈이다. 하여튼 그때까지 경제학과는 인연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몇 년 뒤 동남아에서 공부할 기회가 찾아오자 나는 반갑게 이를 붙잡았다.
연구원에서는 해외 유학생으로 선발되면 서울 시내 영어 학원에 가서 회화 수업을 받아야 하는 규정 비슷한 게 있었다. 내가 찾아간 덕수궁 근처의 학원 원장은 나이가 좀 든 미국 아줌마였는데 대강 이런 인터뷰가 있었다. 원장은 내 직장이 경제연구원으로 되어 있는 걸 보고 대학에서 경제 전공을 했나요 하고 물었다. 아뇨 철학과에 다녔습니다. 그럼 이 연구소가 첫 직장이었나요? 아뇨, 신문사에 다녔습니다. 그럼 경제부에서 근무했나요? 아뇨 정치부요. 그 아줌마가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이 하등 중요할 게 없는 장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내 사회 생활이 내 의사와는 별 상관없이 멋대로 짜깁기되었다는 사실이 이 인터뷰 한 장면에 압축돼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긴 대학생 시절엔 인천의 새벽 어시장에 나가 생선 장사를 한 적도 있으니까 이게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태국 타마삿 대학의 경제학 석사 과정에 들어갔을 때 나는 세는 나이로 마흔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엔 제법 늙은 학생이었던 것 같다. 같은 과정에 들어갔던 어느 태국인 여학생은 내가 다른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 같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태국이 좋았다. 방콕의 술집 거리에 가면 그 당시 유행하던 ‘바빌론 강가에서’가 들리곤 했다. 타국에 노예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고향을 그리는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가 무겁게 덮은 나의 고향과 그 당시도 또 한 차례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자유의 공기가 여전한 태국이 비교되었다.
경제학도 생각만큼 지겹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수 중에는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경제발전론을 가르치던 서독 교수는 태국의 불법입국자 문제를 말하다가 느닷없이 남한 같은 (인기없는) 나라는 그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린 일도 있었다. 독재국가에 사는 서러움의 일단이었다. 사실 이 과정에 들어온 학생들 가운데서도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독재 치하의 학생들은 어딘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유학 기간은 2년으로 끝났으나 나는 몇 년 뒤 다시 태국으로 돌아갔다. 태국 국경지대로 피난한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한 기구에 일자리를 얻은 것이다. 유엔 산하의 UNBRO(United Nations Border Relief Operation)라는 데에 특별사업조정관이라는 직책이었다. 난민은 30만 명쯤 되었는데 그들을 위한 교육, 공동체 생활 지원, 그리고 국경지대 태국 농민들을 위한 사업의 3개 분야에서 프로젝트 조정과 예산 통제가 내 일이었다. 새로운 일을 배우는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지진아급인 내게 하루하루가 진땀 나는 도전이었다.
아무튼 이런 직장 옮기기에서도 동아일보에서의 경험이 나를 바꿔 놓았다는 게 또다시 분명해졌다. 단지 보수나 업무, 사회적 평가나 비전, 또는 직장 생활이 힘들거나 아니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폭 넓고 깊은 관심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내 경험이나 업무능력으로 보아 엉뚱한 선택이었던 이 일은 1년을 겨우 채우고 끝이 났다.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으로 모셨던 박권상 선생님께서 ‘시사저널’이라는 뉴스 주간지를 창간하는데 와서 같이 일하자는 권유가 있었다. 처음 나는 사양했고 아내도 반대했지만 매스컴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내 희망이 수그러들지 않자 받아들였다.
내가 본래 성격이 못된 건지 아니면 동아일보에서의 거친 경험으로 태도가 바뀐 건지 모르겠으나 십여 년 만에 돌아온 언론계에서 적응이 잘 안됐다. 신설 언론사의 어수선함도 있었지만 특히 윗분들과 충돌이 잦았다. 그래 시사저널에서 문화일보로 옮겼다가 다시 시사저널로 갔다가 다시 문화일보로 옮기는 이상한 행보를 찍었다. 처음 문화일보로 옮기는데 신세를 진, 이제는 고인이 된 백기범 형한테 몹시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아내의 차로 출근을 했는데 묘하게 나중에 두 회사가 이웃에 위치하게 됐고 어느 날 아침 아내는 문화일보 앞에 차를 세워야 하는데 시사저널 앞에 세우는 일도 있었다.
내가 노인이 되어서 실감한 건 ‘노인의 지혜’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 옛날 학생 때 독일어 교과서에 나왔던 라틴어 속담, 늙음이 지혜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쪽이 옳은 것 같다. 그러니까 잔소리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겠지.
그런데 지혜가 있든 없든 요즘 언론 상황을 보면 한마디 하고 싶어지는 게 사실이다. 어쩐지 동아투위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헛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투위 자체도 구성원들의 기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아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도 의미 있는 조직으로 살아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간사 모든 건 과정이다. 흐름이다. 그렇게 역사다. 역사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가? 없다.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도 마찬가지다. 그 에너지는 역사의 한 줄기로 언제부턴가 가시적 현상으로 떠올랐지만 근원을 찾아 내려가면 민족 공동체에 자라나던 자유와 정의를 위한 열망, 그 깊은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런 인간 본연의 열망, 진실을 구하는 열망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겠는가?
심하게 말하면 동아투위는 그 구성원의 운명과 상관없는, 어떤 추상적 실체인지도 모른다. 50주년, 100주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비슷한 생각이 든다. 하여튼 그동안 적조했지만 몇 달 뒤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 되면 오래간만에 옛 얼굴들을 만나보고 싶다.
나는 7, 8년쯤 전 내가 사는 동네 주민센터에서 연필화를 배웠다. 70대 중반 나이에 새 취미가 붙은 것이다. 그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그려대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다. 그림 솜씨는 여전히 시원치 않지만 나는 즐겁다.
이부영 위원장의 고마운 권유도 있어서 이 글에 사진 대신 그림 몇 장을 곁들일 생각을 했다. 첫 번째 그림은 조르주 루오의 ‘미세레레’ 연작에 나오는 어릿광대의 얼굴을 모사한 것이다. 그리다 보니 어딘지 내 자화상처럼 변해갔다.
그 다음 민주화 투쟁을 한 컷 그리고 싶었다. 험난한 시대의 현장들을 전쟁터처럼 누비며 기록한 동아투위 친구 윤석봉 형의 사진들에서 이미지를 빌려 ‘촛불의 강’을 배경으로 표현해 보았다. 허락도 안 받았는데 요즘 유행어처럼 극대노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구약의 요나 이야기에 끌린다. 인생의 큰 지혜를 세 글자로 줄이면 장자의 오상아(吾喪我)가 되고 이를 풀어쓰면 요나 이야기, 특히 하나님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가던 요나가 풍랑을 만나자 배에 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큰 물고기의 밥이 되려고 투신하는 길을 택하는 대목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몇 해 전에 그려 페이스북에 올렸던 그림을 싣는다.
마지막에 베토벤 합창교향곡 같은 근사한 테마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는데 잘 안 돼 옛날 그렸던 소 탄 노인으로 바꿨다.
나는 한가한 걸 즐기는 쪽이라 늙은이 생활이 그리 싫지 않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옛 시 한 수를 옮기며 이 어수선한 글을 끝내고 싶다. 고려 때 문신 곽여라는 분의 시다.
소 탄 노인
평안한 모습이네, 소 탄 저 노인
안개비 부연 속에
들길을 가네
저 물가 어디쯤에 집이 있는가
흐르는 냇물 위에
석양이 지네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NH농협 301-0240-3680-71
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