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급감, 치솟는 제작비… "지상파 못 버텨"

글로벌 플랫폼에 국내 방송 종속 우려
"경쟁력 유지 위해 콘텐츠 재투자 여력 증대 필요"

콘텐츠 제작시장의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 의존도가 커지면서 국내 방송산업이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제는 국내 방송 미디어 산업의 지속 가능성마저 의심되는 상황이며, 문화산업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6일 한국방송학회 주최, 한국방송협회 후원으로 열린 ‘K-콘텐츠 생태계의 지속을 위한 지상파방송의 역할과 전망’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국내 방송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적극적인 콘텐츠 제작과 재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K-콘텐츠’의 양대 축이자 방송의 공적 영역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하는 지상파방송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규제 개선과 다양한 정책 지원 등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국방송학회가 26일 개최한 ‘K-콘텐츠 생태계의 지속을 위한 지상파방송의 역할과 전망’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국내 방송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적극적인 콘텐츠 제작과 재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고은 기자

작년 방송매출 처음 감소, 지상파 감소 폭 가장 커

2023 방송사업자 재산상황 요약. 지상파의 영업이익 감소율이 전체 평균보다 5배 크다.

이상원 경희대 교수는 이날 “글로벌 플랫폼에 의한 국내 산업의 종속을 받아들이게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넷플릭스, 유튜브, 디즈니플러스 등 6개 글로벌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 사업자가 2022년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국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이용률도 2017년 36.3%에서 2023년 77%로 빠르게 증가했다. 가장 즐겨 보는 OTT는 유튜브(71.0%)이며, 유료 OTT 1위는 넷플릭스(35.7%)였다.(2023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 와이즈앱·리테일·굿즈 분석에 의하면 유튜브 앱 1개가 한국인 전체 스마트폰 사용시간의 33.6%를 차지한다.

OTT가 가져간 건 트래픽과 시간만이 아니다. 광고는 물론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까지 OTT 등 온라인에 집중되면서 국내 방송산업은 쪼그라드는 추세다. 2023 방송사업자 재산상황에 따르면 지난해 방송사업매출은 2022년 대비 9403억원(4.7%) 줄어 10년 만에 첫 감소를 기록했다. 특히 지상파(10.2%)의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전체 방송사업자 영업이익은 8177억원(21.4%)이 줄었고, 지상파의 영업이익 감소율은 115.4%에 달했다.

치솟는 제작비 감당 불가능…재원 확보 위한 규제 개선 요구

매출 감소에도 지상파의 프로그램 제작비는 크게 줄지 않았다. 매출액 대비 지상파의 제작비 투자 비율은 76.0%로 2022년(68.9%) 대비 오히려 늘었다. 문제는 글로벌 OTT의 영향으로 제작비 전반이 크게 뛰고 있단 점이다. ‘무빙’(디즈니플러스) 제작비는 500억원이 넘고, ‘오징어게임2’(넷플릭스)는 1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대비 2023년 지상파 제작비는 806억원(0.7%) 증가했는데, 이는 “OTT 오리지널 콘텐츠 두 편 만들면 없을 액수”다. 이 교수는 “경쟁력을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했다.

매체별 방송사업매출 점유율 변동 추이(’14년~’23년). 지상파 독점 체제는 2018년 이후 IPTV에 1위 자리를 내주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2023 방송사업자 재산상황 요약

콘텐츠 제작 비용의 증가는 방송사업자는 물론 OTT 플랫폼 등 미디어 사업자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광고위축 등 수익감소의 영향으로 방송사업자의 콘텐츠 투자 재원은 점차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이상원 교수는 “콘텐츠 제작-재투자의 선순환 생태계 조성을 위해 국내 방송 미디어 사업자의 재원 구조 개선이 필수”라며 관련 규제 및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광고 및 협찬 규제, 소유제한, 편성규제 등의 완화는 물론 지상파 제작 K-콘텐츠에 대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정부가 조성 계획 중인 ‘K-콘텐츠 미디어 전략 펀드’의 혜택이 OTT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일부를 방송·미디어 콘텐츠의 글로벌 유통을 지원하는 재원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지상파는 PP(방송채널사용사업자)와 함께 방송 미디어 분야에서 K-콘텐츠의 양대 축을 형성해 왔고, 향후 국내 방송 미디어 산업과 K-콘텐츠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서도 지상파 콘텐츠의 경쟁력 유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며 “모든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 산업을 살려야 하고 살릴 생각이 있다면 디지털 전환에 맞는 규제 혁신이 지상파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능으로 돈 벌어 다큐 만들던 시대는 끝났다?

홍원식 동덕여대 교수는 공공재로서의 지상파와 제작시장, 공론장, 한류에서 차지하는 지상파의 역할과 가치를 평가하며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지상파 영역에 대해 정확히 가치를 산정하지 않으면 방송의 공공성도 시장의 힘에 휩쓸려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지상파가 전체 방송사업자 제작비의 절반(50.2%, 2023년)을 차지할 만큼 방송 제작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고, 특히 외주제작 시장에서 상위 수요자로서 제작시장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평가했다. 교양, 다큐멘터리 등 비드라마 영역에서 지상파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최근 OTT가 외주제작의 주요 수요자로 부상하지만, OTT 제작 수요는 드라마 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상파 콘텐츠의 해외 수출액은 꾸준히 증가하며 한류를 주도하는 한 축을 담당해왔다. /2023 방송산업 실태조사

그러나 글로벌 OTT를 중심으로 늘어난 제작 수요는 제작단가 상승, 광고시장 위축, 수익성 약화 등과 연결돼 국내 방송사업자의 위축을 가속화 할 우려가 크다. 홍 교수는 “그동안 지상파는 예능으로 돈을 벌어 보도와 교양에 투자해왔는데, 더 이상 드라마와 예능에서 돈을 못 벌게 되면 시사와 교양에 투자하는 비율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면서 “국내 방송산업 전반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OTT가 방송서비스를 대체할 가능성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와 예능 등 오락적 측면에선 기존 방송을 상당 부분 대체했거나 오히려 넘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지상파의 실시간 보도와 지역성, 공공성 등의 사회적 가치는 OTT가 대체하기 어려운 고유한 성격”이다. 따라서 지상파방송의 가치는 지상파 콘텐츠의 시장 가치뿐 아니라 “공론장에서 역할과 방송산업의 정책적 고민 속에서 다면적으로 평가돼야 할 대상”이라는 게 홍 교수의 진단이다.

재점화하는 지상파 재송신 갈등…“국가 개입 안돼”

지상파 가치 평가는 유료방송 재송신 대가 산정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지상파 재송신을 둘러싼 유료방송과의 분쟁은 2008년부터 시작된 해묵은 사안이며, 방송 시장의 축소로 동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앞으로는 분쟁이 더 심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세미나를 후원한 지상파방송사 단체인 방송협회는 IPTV 3사가 지난 1월 지상파 재송신 대가를 포함한 콘텐츠사용료 산정방안을 발표하자 “사업 리스크를 콘텐츠 영역으로 떠넘기려는 일방적 시도를 중단하라”며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료방송 관련 단체들은 세미나 등을 통해 지상파 재송신 대가 산정 방식 개편 논의에 군불을 지피는 중이다.

한국방송학회가 26일 개최한 ‘K-콘텐츠 생태계의 지속을 위한 지상파방송의 역할과 전망’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국내 방송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적극적인 콘텐츠 제작과 재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고은 기자

이런 논의의 한 축에는 정부가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9월 IPTV 3사에 재허가를 결정하면서 ‘유료방송시장의 공정하고 합리적인 콘텐츠 사용료 배분을 위하여 객관적 데이터를 근거로 한 콘텐츠사용료 산정기준과 절차를 마련하여 공개’하라는 조건을 부과했다. 1월에 나온 콘텐츠사용료 산정방안은 이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이에 방송협회는 유감을 표명하며 “IPTV 이익만을 보호하려는 과기정통부가 하루빨리 편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전체 미디어업계의 발전을 위한 균형잡힌 정책에 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과거 재송신료 분쟁에서 지상파를 대리해 소송했던 김우균 변호사(법무법인 세종)는 “국가에서 재송신 협상에 관여하는 게 적절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명백한 법률 근거 없이) 국가가 함부로 개입하면 시장 자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면서 “지상파가 원하는 만큼 수익을 못 내면 콘텐츠에 투자할 수 없게 되고 이는 선순환이 아닌 악순환을 가져온다. 결국, 우리나라 방송과 콘텐츠 시장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플랫폼 강자들의 방송 기여 강화해야”

IPTV 사업자들이 콘텐츠 투자 등 방송에 더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배진아 공주대 교수는 “IPTV 사업자들이 얻는 수익이 콘텐츠에 적극 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성동 인하대 교수는 “지상파의 역량과 노력만으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유지하기에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면서 “플랫폼사업자와의 공생과 협력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지상파와 PP 영역에서 양질의 콘텐츠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아 국내 방송영상 산업의 내수 선순환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체계인 플랫폼 산업의 안정적인 유지도 가능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조 교수는 “플랫폼사업자들이 콘텐츠 펀드를 만들거나 정부가 매칭펀드를 만드는 식으로 플랫폼도 살고 방송영상 시장도 같이 사는 선순환 내수 구조가 형성될 수 있도록 통신 기반 사업자들의 기여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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