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나 방송에서 익명의 취재원이 등장하는 기사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가령 지난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정부의 의료 정책에 관한 기사에서는 6개의 인용문 중에 5명의 발언자가 익명 처리돼 있었다. 나머지 하나도 당일 나온 정부의 발표를 ‘정부’를 주어로 쓴 것이었다. 사람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와 ‘빅5의 한 신경외과 교수’는 그런 발표의 문제를 지적했다. 과거의 대형병원 문제는 ‘의료계’와 ‘의료계 인사들’의 말로 제시된다. 이런 기사를 읽다 보면 정말 당일에 실제 인물을 취재해서 쓴 것인지부터 궁금해진다.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와 ‘빅5의 한 신경외과 교수’가 같은 사람은 아닐지, ‘의료계’나 ‘의료계 인사들’의 말은 혹시 평소 알고 있던 내용 같은데, 이렇게 쌍따옴표로 인용하듯 써도 되는지 궁금해진다.
언론 내부에서는 이렇게 취재원을 익명 처리하는 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을까? 데스크는 익명 처리된 취재원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기자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취재했고, 그들의 전체 발언은 어땠는지, 익명화해야 할 사정은 무엇인지 등이 뉴스룸 안에서 투명하게 공개되고 검증받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한국은 점점 ‘익명’을 숭상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명예훼손이나 초상권침해 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예 익명화하고 얼굴을 가리는 일이 거의 기본으로 취급받는다. 명예훼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직접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고도 막상 방송이 나간 뒤 ‘당연히 모자이크 처리할 줄 알았다’며 소송을 낸 사람도 있다.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 브리핑을 한 뒤 ‘고위 관계자’로 익명화를 요구한 일도 있다. 그러니 어지간한 기사에 익명화된 취재원이 등장해도 이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연구까지 나왔다.
문제는 이런 무차별적인 익명화가 언론 내부의 신뢰 유지와 정상적인 작동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방송사에서 일상화된 흐림처리나 음성변조 등의 익명화 관행을 악용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KNN 기자가 자기 목소리를 변조해서 서로 다른 취재원으로 등장해 1인 다역을 했다가 적발된 일도 있고, 회사 동료를 인터뷰해 전자담배 소비자나 반려동물을 안고 운전하는 사람으로 등장시킨 사례도 있다. 이런 일들은 회사 안에서 누군가 발견하지 못하면 시청자들은 알아낼 도리가 없다.
익명 보도 중에는 대법원이 채택한 범죄 보도 등에서의 익명보도 원칙 때문에 불가피한 것도 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익명이 기본이 되면서 실명을 쓰려면 정말 특별한 사정이 있어야 하는 정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광범위한 익명화가 과연 이렇게 불가피한 것들뿐일까?
만약 누군가를 실명으로 인용하려면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인용한 문구가 정확한지도 꼼꼼히 따지고, 당사자 확인도 거쳐야 한다.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실명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여러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기자는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기사를 쓰면서 재량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런 점만 생각하면 굳이 실명을 쓰려고 취재원 설득에 시간을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데스크가 익명 취재원이 누구이고 전체 발언은 어떠했으며, 왜 굳이 익명으로 써야 하는지 일일이 따진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정말 특별한 필요가 없는 한 익명 취재원의 말을 기사에 넣지 못하게 한다면 더 그렇다.
매일 엄청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뉴스룸에서, 익명 취재원 문제를 놓고 이렇게 시간을 써야 할지 회의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명 사용에 동의하는 취재원을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당장 설득에 성공하지 못해도, 오늘 취재원을 설득하는 데 들인 시간은 내일을 위한 저축이 될 수 있다. 오늘 너무 쉽게 타협하면 내일도 같은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
공직자 등은 당연하고 길거리에서 만난 일반인도 실명 사용을 최대한 설득해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익명을 요구하는 취재원의 말은 보도에서 제외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힘이 들어도, 이렇게 취재원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도 언론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모든 언론이 ‘옥천신문’처럼 실명 취재원만을 쓸 수는 없지만, 한발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