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서 다시 징벌적 손해배상제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22대 국회가 열리자 다시 나타났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회기에 이어 징벌적 손배를 담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5월31일 제출했다. 허위인 줄 알면서 왜곡보도로 인격권을 침해하면 언론사가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는 내용이다. 정정이나 반론보도 때 원 보도와 같은 분량으로 실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징벌적 손배에 반대하며 언론계가 대안으로 약속한 자율규제 도입 논의는 겉돌고 겉돌았다.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한 7개 언론현업단체들은 징벌적 손배 논의가 정점에 이르던 2021년 9월 ‘통합형 언론자율규제기구’를 설립해 신뢰를 회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언론단체 대표들은 “국민의 질책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고개까지 숙였다. 하지만 이후 정치권에서 징벌적 손배 의지가 수그러들자 자율규제 논의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자율규제 논의가 ‘소나기 피하기’였다는 비판을 불렀다.
민주당이 징벌적 손배를 지난번처럼 당론으로 채택해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언론계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올해 자율규제를 다시 논의해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또 겉돌지 않으려면 그 전에 먼저 짚어 봐야 한다. 언론계의 자율규제 논의는 어디까지 진척됐고 난점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논의는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까.
벌점 쌓이면 퇴출, ‘실효성’ 갖춰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 한국여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7개 언론단체는 2021년 9월 자율규제기구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강형철 숙명여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언론학자 6명이 참여했다.
연구위는 2021년 12월 구체적인 자율규제기구 설립안을 보고서에 담아 내놨다. 자율규제기구는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하고 비상근인 9명의 자율규제위원회 아래 업무 부서로 자율조정실과 사무국을 설치해 상근 직원을 두는 안이다. 고용해야 할 전체 인원 수를 미리 정하지는 않았지만 각 부서 아래 다시 두 개씩 팀을 두는 안을 제안해 상당한 규모를 상정했다.
주요 업무는 자율조정실의 자율조정인들이 맡는다. 역할은 두 가지다. 모니터링팀에서 자체규약 위반으로 심의에 올린 방송, 신문, 인터넷 보도에 제재 수위를 판단하고, 언론중재위원회처럼 언론피해 신고가 접수되면 정정이나 반론보도, 위자료나 노출 중단 등 합의를 유도하는 일이다.
특히 자율규제가 실효성을 가질 수 있게 설계도 이뤄졌다. 스스로 규제를 받겠다며 참여하면 이익을 주고 규약을 못 지키면 퇴출해 불이익을 주는 식이다. 보도가 규약을 위반했거나 언론피해를 일으켰다면 기자 개인을 징계하지 않지만 언론사에는 주의, 경고, 제재금 등 제재를 준다. 이때 벌점도 함께 누적돼 자율규제 시스템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제재와 퇴출 등 모든 결정 소식은 포털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리기 때문에 신뢰도가 중요한 언론사로서는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자율규제에 참여하면 포털 제휴 심사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금, 정부광고 배정 때 이익을 받지만 퇴출사는 여러 언론단체에서 주는 각종 언론상을 받을 자격도 박탈된다.
연구위는 이런 제재가 법적 처벌보다 오히려 효과적이고 효율적, 현실적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타율인 법적 규제는 징역이나 벌금형이 필요할 정도로 큰 잘못만 잡아낼 수 있다. 자율규제는 세세한 교정이 가능해 애초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목표가 언론의 품질과 신뢰 회복이라면 더 적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언론사 재원 분담 놓고 쟁점
연구를 바탕으로 기구 설립을 실현하는 과제는 이후 실무연구위원회로 넘어갔다. 연구위 구성 때는 없었던 한국방송협회까지 참여해 자율규제를 추진하는 언론단체는 8개로 늘었다. 이들 단체 실무자들은 2022년 1월 첫 회의를 열고 논의를 이어나갔다. 해가 바뀌기 전 자율규제기구를 출범한다는 목표였다.
언론단체들은 재원 문제에 부딪혔다. 통합형 자율규제기구가 출범한다면 자율심의에 언론진흥기금을 줄 수 있게 한 신문법 시행령에 따라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기구의 독립성과 자율규제 실효성을 위해서는 참여 언론사들이 내는 분담금 비율은 높을수록 긍정적이었다.
연구서는 재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다. 연구서는 “언론사들도 자율규제에 대한 책임성, 참여 의지 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일정한 분담금 납부가 필요하다”면서 “공적 재원과 분담금 비율, 그리고 구체적인 분담금 징수 방법 등에 대해서는 추후 기구 설립 과정에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과제를 남겼다.
자체 재원 마련은 언론단체들이 나눠 부담하거나 언론사들로부터 새로 걷어야 해 의지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더욱이 신문사들은 기존 자율규제기구인 한국신문윤리위원회(신문윤리위)에, 인터넷신문사들은 인터넷신문윤리위원회(인터넷신문윤리위)에 이미 분담금을 내고 있다. 두 곳 모두 매년 7억원 정도 언론진흥기금을 받지만 연간 예산의 3억원가량은 분담금으로 충당한다. 통합형 자율규제기구가 출범한다면 언론사들이 또 다른 분담금을 내기는 부담이 될 수 있었다.
‘통합형’ 기구, 통합에 합의 못 해
언론단체들은 기존의 자율규제 기구들을 통합하는 데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통합은 분담금을 일원화하고 이들이 받던 언론재단의 지원금을 확보하는 데에도 긍정적이지만 실효성 확보 차원에서도 필요성이 있었다. 자율규제기구가 중복돼 있으면 언론사들이 새 기구가 출범해도 가입할 유인이 떨어지고 퇴출 징계를 받더라도 제재 실효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통합 필요성은 연구서에서도 설명됐다. “매체별로 분산된 자율규제기구의 운영은 같은 내용이 매체를 오가며 전달되는 현 미디어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과 “자율규제 기구별로 상이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 일부 심의 대상은 중복된다는 점, 무엇보다 ‘솜방망이’ 제재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 상황으로 지적됐다.
실무연구위에서 인터넷신문협회는 인터넷신문윤리위를 통합하는 데 찬성했다. 인터넷신문협회는 2012년 인터넷신문윤리위 창립을 주도했고 이사도 선임하고 있었지만 이해관계는 멀어진 상태였다. 인터넷신문윤리위가 심의 전문성과 제재 의지는 부족한데 언론사 800여 개를 무분별하게 가입시켰다며 문제를 제기하며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언론단체는 신문윤리위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정작 통합의 대상이 되는 신문윤리위에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신문협회와 기자협회, 편집인협회가 신문윤리위에 이사를 선임하긴 하지만 신문윤리위는 특정 단체 산하기관이 아니라 독립된 기구여서 대등한 위치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신문윤리위는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문제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기구이기도 하다. 신문윤리위는 1964년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반대하며 자율규제 업무를 시작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은 자율규제를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언론사 대표를 내쫓을 수 있게 해 기자들이 집단반발한 ‘언론파동’을 불렀다.
정관안 만들고 논의 중단
언론단체들은 기존 자율규제기구 통합 여부를 놓고 합의안을 만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통합형 자율규제기구의 정관안을 43개 조로 만들어놓고도 논의를 더 진척하지 못했다. 결국 2022년 9월 언론단체 대표자 회의를 열고 9개월 동안 이어간 활동을 끝냈다.
실무연구위는 언론단체 사이 합의안을 우선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관계 기관들의 협조를 받아낸다는 구상이었는데 첫 단계부터 실현하지 못한 셈이 됐다.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 전에 정당들과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정책협약을 하기로 했지만 가시적인 합의안이 나오지 않아 추진하지 못하기도 했다.
언론노조는 통합형 자율규제를 다시 논의해 보자며 국회의원선거가 있기 전인 올해 1월 언론단체들에 제안했다. 하지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방송3법 추진과 연이은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법정제재 남발 등 정치적 현안이 계속돼 지금까지 논의를 시작하지 못했다.
다른 언론단체들은 재추진에는 중립적이거나 유보적이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신문협회는 6월 인터넷신문윤리위를 신뢰하기 어렵다며 내년 초 실효성을 갖춘 자율규제기구를 새로 출범시킨다는 계획이어서 앞으로 통합 논의는 더 복잡다단해질 수 있다.
자율규제 재논의 출발점
재추진을 바라는 언론노조는 이전처럼 언론단체 안과 밖을 나눠 단계적으로 합의해 나갈 게 아니라 논의 참여자를 오히려 관련 기관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지난 논의에서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도입이 언론단체들만의 의지나 합의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실무연구위는 언론단체 내부 합의에만 우선 치중하느라 방심위나 언론중재위, 언론재단, 포털 뉴스제휴평가위원회(제평위) 등 외부와는 소통하지 않았고 공감대와 지지를 얻지 못했다. 재원이나 제재 범위 설정은 언론단체끼리 합의한다고 해서 실현하기 어려운데 이 때문에 통합형 자율규제기구가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기대와 추진 동력이 떨어진 점이 한계였다.
통합형 자율규제기구가 애초 취지대로 신문뿐만 아니라 방송보도도 심의하려면 연예·오락프로그램 심의는 방심위에 남겨두고 보도 영역은 넘겨받아야 한다. 방통위설치법을 개정하거나 적어도 업무협약이 필요한 것이다. 방송협회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논의가 이뤄진 탓에 이중규제를 우려하며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었다.
언론피해 사건의 경우 언론중재위와 동시에 같은 사건을 진행하지 않으려면 법상 교통정리가 있어야 한다. 제재 실효성 확보를 위해 제평위와 업무협약이 가능한지도 관건이다. 통합이 이뤄지면 기존 자율규제기구가 받던 지원금을 넘겨받을 수 있는지도 언론재단과 감독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의사를 타진해야 하지만 지금껏 전혀 하지 못했다.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논의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