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전남 순천에서 일면식 없는 10대 여성을 거리에서 살해한 가해자 박대성(30)에 대해 경찰은 범행 동기를 밝히지 못했다. 검찰 송치 후 경찰은 ‘이상 동기 범죄’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언론은 이 사건을 ‘무차별 살해’로 다루고, 범행 동기가 “오리무중”이라는 제목을 단다. 2024년 한국 사회는 박씨가 피해 여성을 왜 800m나 쫓아가서 살해해야 했는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고 한다.
원한도 금전적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죽을 만큼 흉기를 휘두르는 건 자연스럽게 납득되는 상황은 아니다. 가해자가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선택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하는 ‘무차별 범죄’(Random Crime) 개념을 가져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좋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A양은 정말 ‘무차별하게’ 겨냥되었나. 일면식 없는 사이의 살해 사건에서 분명히 성별화되는 피해양상을 무시한 채 그저 ‘모르는 사람’으로 퉁치는 건 온당한가.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을 만만히 여겨 손쉽게 범행 대상으로 삼는 것을 사회 문제화하지 않으려는 국가의 태도는 적절한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회피하는 이 사회야말로 여성들에게는 ‘오리무중’ 그 자체다.
순천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들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떠올렸다. 남성이 처음 본 여성을 별 이유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유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해자는 상가 화장실에서 여러 남성을 그냥 보낸 뒤 여성이 들어오자마자 살해했다.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도 진술했다.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기반한 혐오범죄, 여성 표적 살해 등으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그러나 그때나 8년이 지난 지금이나 수사 기관 및 사회 전반의 시선은 ‘여성혐오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식 석상에서 남성의 여성 살해를 뜻하는 ‘페미사이드’(Femicide)는 좀처럼 개념화되거나 가시화되지 못한다. 한국에서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는 것 자체로는 여전히 사건화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성은 무차별하게 희생되는 피해자들 중 한 유형일뿐이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여성이라서만’ 당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다. 그 ‘다른 이유’가 안 보일 때조차 안갯속에 남기면 남겼지 성별이 핵심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꿋꿋이 외면한다. 이런 사회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더더욱 “여성이 약해보여서 당한 것이지 여자라서 당한 건 아니”라는 흔한 반론을 그냥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애초에 ‘약해보여서 당한’ 모든 사회적 약자 대상의 혐오범죄에 더 엄벌하는 분위기조차 감지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 중에도 여성을 겨냥한 남성의 ‘분풀이성 범죄’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엄중하게 수용되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지기 일쑤다. 남성의 여성 살해가 오직 신체적 차이에서만 기반한다고 보는 것도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이다. 여성의 피해를 문제로 여기지 않아 온 사회문화적 영향, 남성의 화풀이 대상으로 여성이 희생돼 온 역사에 대한 분석 등이 더해져야 한다.
힘없는 이가 당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가중처벌하기는커녕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여기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곳에선 이런 무력감만이 팽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