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과 2026년 최가온

[박종민의 K-스포츠랩]

최가온이 12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결선 경기를 펼치고 있다. 최가온은 1차 시기에서 크게 넘어져 충격을 안겼으나 3차 시기에서 90.25점을 획득해 강력한 우승 후보 클로이 김(미국)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AP·뉴시스

292513. 1990년대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했던 이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숫자다. 1995년 10월 4집 앨범으로 컴백 무대를 가지면서 서태지가 착용했던 비니에 적혀있던 숫자다. 그가 선보인 스톰(292513=STORM) 브랜드의 비니, 고글, 헐렁한 스노보드룩은 갱스터 힙합 장르의 타이틀곡 ‘컴백홈’과 함께 힙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야말로 문화대통령이었다. 소풍을 가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데뷔곡 ‘난 알아요’나 2집 ‘하여가’를 따라 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많았다. 어린 시절 물구나무서기에 재주가 있었던 기자 역시 동네 친구들과 함께 이주노가 선보인 헤드스핀을 따라 하려 무진장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가요계에서 잠적과 복귀의 개념을 만들고 지상파 방송사를 상대로 협상할 수 있는 유일한 연예인이라 불린 서태지와 아이들이 7개월 공백을 깨고 다시 나와 선보인 4집 패션은 음악과 안무 못지않게 파격적이어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시절 스노보드룩은 분명 생소한 패션이었다.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알려진 스노보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인식이 좋지 못했다. 스키가 좋은 교육을 받고 잘 사는 백인 중산층 이상이 향유하는 고급 스포츠로 받아들여졌다면 스노보드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저소득층의 스포츠로 여겨진 것이다. 스노보드는 국내에서도 스키어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 종목이었다. 스키어들은 스노보더들로 인해 동선에 방해를 받고 부상 위험까지 생긴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상당수 스키장에서 스노보드의 출입을 불허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과 김종서가 ‘프리 스타일’ 뮤직비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프리 스타일’ 뮤직비디오

스노보드는 금기를 깨는 ‘저항’과 ‘자유분방’을 상징했다.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힙합 문화와 일맥상통했다. 서태지와 이주노, 양현석 등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이 스노보드를 즐기는 장면은 4집 수록곡 ‘프리 스타일’ 뮤직비디오에 온전히 담겼고, ‘필승’과 ‘시대유감’ 뮤직비디오에도 일부 삽입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힙합의 저항 정신과 자유분방을 하늘을 향해 도약하는 스노보드 장면을 통해 한껏 표현했다.

서태지는 훗날 공식 채널에서 ‘프리 스타일’ 뮤직비디오 제작과 관련해 “정말 스노보드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다. 보드를 타는 영상을 직접 찍고 거기에 직접 음악도 만들어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너무도 설레고 행복한 작업이었다”고 돌아봤다. 이상헌 스노보드 알파인 대표팀 감독 등이 국내 1세대 스노보더로 꼽히지만, 스노보드를 크게 알린 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노보드는 이후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했다. 이주노가 제작한 혼성그룹 영턱스클럽의 멤버 송진아가 2008년 스노보드 국가대표로 전향하면서 화제가 됐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배추보이’ 이상호가 은메달을 획득해 한국 설상 종목 첫 입상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번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여고생 스노보더 최가온(금메달)을 비롯해 김상겸(은메달), 유승은(동메달) 등이 메달 성과를 내며 효자 종목으로 발돋움했다.

최가온은 대회 이전까지 국내 누구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적 없었던 미지의 종목에서 자신의 우상인 클로이 김(미국)을 누르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2008년 11월생인 최가온은 클로이 김이 2018년 평창 대회 때 수립한 이 종목 최연소 올림픽 금메달 기록(17세 10개월)을 17세 3개월로 경신했다.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최가온은 1차 시기 두 번째 점프를 시도하다가 크게 넘어져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았다. 2차 시기를 앞두고 잠시 전광판엔 ‘출전하지 않는다(DNS)’는 표시가 떴지만, 다시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다. 2차 시기에서 또 넘어진 그는 3차 시기에서 1080도 이상의 초고난도 연기 대신 900도와 720도 회전 등을 구사했고 결국 90.25점의 고득점을 받아 클로이 김(88.00점)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차 시기를 앞두고 결선에 오른 12명 중 11위에 머물러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대역전 우승이었다. 최가온은 “내 승부욕이 겁을 이긴 것 같다”고 금빛 도약 순간을 떠올렸다.

최가온이 12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기뻐하고 있다. /AP 뉴시스

아버지 최인영씨와 어머니 박민혜씨 사이에서 태어난 최가온은 스노보드 애호가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스보노드를 즐겼다. 최인영-박민혜 부부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를 몸소 체감한 X세대다. 최가온 가족의 삶에서 어쩌면 국내 스노보드의 발전 역사까지 엿볼 수 있는 셈이다.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라며 결국 금메달 스노보더가 된 최가온은 “국내에 하프파이프 훈련을 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인데 그마저도 시설이 완벽하지 않아 아쉽다”고 열악한 국내 환경을 지적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피겨 여왕’ 김연아가 불모지 수준이었던 피겨 환경 개선에 기여했듯이 최가온의 금메달도 국내 스노보드 환경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K-팝의 원조 서태지와 아이들이 쏘아 올린 스노보드 열풍이 약 30년을 지나 K-스노보더 최가온의 부상 투혼으로 달콤한 결실을 맺었다는 스토리는 많은 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아울러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은 쇼트트랙 등 빙상 종목이 메달 텃밭이었던 K-동계 스포츠에 스노보드 등 설상으로 입상 종목 다변화를 꾀하게 된 대회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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