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민국의 디즈니가 되는 것”
홍정도 중앙그룹 부회장은 2023년 5월 SLL중앙 구성원과 소속 레이블 대표들이 참석한 타운홀 미팅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SLL은 JTBC가 2017년 발족한 디지털 콘텐츠 스튜디오 ‘스튜디오 룰루랄라’를 모태로 2020년 ‘JTBC 스튜디오’를 거쳐 2022년 4월 지금의 사명을 갖게 된 중앙그룹 산하의 콘텐츠 제작사다. 홍 부회장이 제시한 목표는 비단 SLL만의 지향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국내 굴지의 신문(중앙일보)과 방송(JTBC)은 물론 영화관(메가박스), 레저(휘닉스파크) 등 다양한 사업을 포괄한 중앙그룹으로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 미디어 그룹이자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모델로 성장을 꿈꿨을 만하다.
그로부터 3년 후, 홍 부회장은 많은 기자들 앞에서 중앙그룹 지주사인 중앙홀딩스와 JTBC 등 5개사의 회생절차 신청에 대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도미노 위기는 JTBC가 12일 만기인 206억원의 회사채를 갚지 못하면서 시작됐다. 알려진 바로는 SLL이 2022년 제작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수리남’의 제작비가 350억원 정도다. 드라마 한 시즌 제작비도 안 되는 돈을 갚지 못해서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 경고음은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론, 다시 말해 ‘큰 언론사는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 혹은 신념이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을 가로막았을 뿐이다. 이 경고음은 JTBC 재무제표에서만 들려온 게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국내 방송·미디어 산업과 세계가 열광한다는 K-콘텐츠 산업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일 수 있다. 회생절차를 기다리는 JTBC만이 아니라 우리 방송·콘텐츠 시장 전반에 대해 구조 개혁에 가까운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격적 투자에 출자 제한→ ‘차입경영’
JTBC 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10년 채널A, MBN, TV조선과 함께 신규 종편 4개사에 선정되던 순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해 마지막 날, 방송통신위원회는 ‘과당 경쟁’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4개 사업자를 한꺼번에 승인했고, 직후부터 ‘5년 내 폐업하는 곳이 나올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제기됐다.
이 예측은 개국 15년만에 JTBC를 위협하는 비수가 됐다. 개국 이후 세 번의 재승인 심사에서 모두 1위를 기록할 정도로 4사 중 가장 ‘종편다운 종편’으로 평가됐던, 콘텐츠 투자에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방송사가 제일 먼저 위기를 맞는 상황이 된 것이다.
JTBC는 개국 초기부터 공격적인 투자로 눈길을 끌었다. 개국 이듬해인 2012년과 2013년엔 매출액의 2배 이상을 제작비로 투자했고, 2014년에도 매출액보다 많은 제작비를 투자했다. 2016년까지도 버는 돈을 거의 제작비로 썼다. 종편 4개사의 전체 제작비에서 JTBC의 제작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약 47%로 절반에 가까웠고, 2024년까지도 30~40%대에 달했다.
당연히 개국 초부터 적자가 쌓였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2016년까지 줄곧 마이너스였다. 2016년부터는 부채비율도 폭증했다. 2015년만 해도 70%대였던 부채비율이 이듬해 580%대로 8배 이상 뛰었다. 증자가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모기업(중앙일보)이나 홍석현 회장 일가의 추가 출자는 막혀 있었다. 방송법상 신문사의 종편 소유 지분은 30% 이내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자본 조달을 위해 차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본격적인 차입 경영이 시작된 이 시기 JTBC의 뉴스 신뢰도와 영향력은 급성장했지만, 자본잠식은 누적됐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2019년 무상감자를 추진했다가 방통위 승인이 지연되는 사이 내부 상황 변화 등을 이유로 철회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으로 드라마·예능에선 눈부신 성과가 이어졌다. 2018년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유료방송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2020년 ‘이태원 클라쓰’, ‘부부의 세계’가 잇따라 ‘대박’을 치면서 자신감은 더 커졌다. 차입 등을 통해 2019년부터 제작사 인수 및 지분 투자를 늘리며 스튜디오를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tvN은 물론 지상파 3사와도 경쟁하는 ‘탈종편’ 급으로 올라섰다.
SLL 상장 위해 투자 계속, IP마저 넘겨
그러나 외화내빈이었다. 2021년 JTBC 부채비율이 급기야 1000%를 넘어섰다. 코로나19 여파로 콘텐츠 수요가 폭증하면서 방송광고 시장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고, 덩달아 JTBC 매출도 10% 넘게 오른 해였는데도 그랬다. 넷플릭스가 2019년 ‘킹덤’을 시작으로 한국 작품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제작비가 전체적으로 껑충 뛴 영향이 컸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 도입된 주 52시간제 영향까지 더해지면서 회당 제작비가 웬만한 드라마 한 편 제작비와 맞먹는 수준이 됐다.
그래도 시장엔 기대감이 돌았다. 2021년 ‘오징어게임’의 세계적 성공에 고무된 까닭이었다. 2021~2022년 사이 스튜디오드래곤, 초록뱀미디어 같은 드라마 제작사들은 물론 SLL의 최대주주이자 상장사인 콘텐트리중앙은 주가가 6만~9만원대까지 치솟았다. 황금기로 보였지만, 신기루였다. 가입자 정체기를 맞은 넷플릭스 등 OTT들이 물량 공세를 멈추고 텐트폴(대작) 위주로 투자하거나 예능 같은 ‘가성비 전략’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가 지식재산권(IP)을 가져가는 대신 제작사에 보장하던 수익률도 초창기 10%대에서 4~5% 혹은 그 이하로 줄었다. 게다가 2021~2022년 반짝 상승했던 방송광고 시장은 2023년 들어 가파르게 급감했다. 제작비는 높아지고, 방송광고는 줄고, 넷플릭스가 보장하는 마진율도 줄면서 수익을 내기는커녕 제작비를 회수하기도 어려운 구조가 된 것이다. 결국 ‘만들면 적자’인 구조에서 대부분의 방송사·제작사가 드라마 제작·편성을 축소하는 방편을 택했다.
그러나 JTBC와 중앙그룹은 달랐다. SLL 상장을 목표로 한 중앙그룹은 포트폴리오 확대를 위해 투자를 줄이지 않았다. 덕분에 SLL은 JTBC의 안정적인 편성을 보장받으며 드라마 제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2022년 12월엔 ‘아는 형님’, ‘밀회’ 등 JTBC의 예능·드라마 279개 작품 IP가 SLL로 넘어갔다. JTBC는 매각 대금 433억원으로 그해 영업이익과 당기순익 흑자를 기록했지만, 이듬해부터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JTBC이 보유한 SLL 지분은 2%대에 불과해 ‘흑백요리사’ 등 글로벌 흥행작이 나와도 JTBC 수익은 제한적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스튜디오드래곤도 그렇고 처음엔 상장시킬 목적으로 밀어주기를 하고 본 채널이 피해를 보는 구조가 되는데, IP까지 넘긴 JTBC는 그게 제일 심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장 전체 재생산 구조가 죽어버린 상황에서 JTBC가 상투를 잡았고, 물 들어올 때가 끝나고 썰물처럼 나가기 시작하니 그런 JTBC가 제일 위험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2021~2022년 짧은 황금기를 누렸던 콘텐츠 제작사들의 주가는 이후 90% 안팎의 기록적인 폭락을 겪었다. 한때 기업가치 1조원 이상으로 평가되던 SLL이 성공적으로 상장됐더라도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2021년 잠깐 반등했던 방송시장이 다시 하락세로 접어들 때, JTBC(중앙그룹)가 확장보다는 경영 내실화를 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게 이종관 법무법인 세종 수석전문위원의 생각이다. 이 위원은 “JTBC 문제는 내수 시장 대비 사업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전제하며 “콘텐츠 사업자가 200개가 넘으니 투자에 대한 리쿱(회수)이 보장되지 않고, 그러니 투자 대비 효과(ROI)는 안 나오고, 적자는 쌓이고 부실이 계속돼서 차입도 어려워지니 소위 돌려막기 하는 게 반복되면서 임계점을 넘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돈 못 버는 구조인데 콘텐츠 투자해라?
지난해 전체 방송광고 매출은 2조원대까지 떨어졌다. 2025년도 방송사업자 재산상황 공표집에 따르면 방송사업자당 평균 광고매출은 2016년 99억원에서 2025년 54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지상파는 같은 기간 312억원에서 104억원으로, 정확히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프로그램에 광고를 붙여서 번 돈으로 제작비를 회수하고 이익도 내는 기존의 비즈니스 구조는 사실상 붕괴됐다. 천혜선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콘텐츠에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광고 수익밖에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광고시장이 위축되고 있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위기에 빨리 봉착한다는 딜레마를 방송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자본을 조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가 이미 국내 투자를 줄이고 일본 등 다른 제작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데다가, JTBC 사태가 콘텐츠 시장에 미칠 ‘칠링 이펙트’도 우려된다. 다른 종편은 물론 지상파 방송사들도 콘텐츠 투자를 줄이는 것은 물론, 콘텐츠 사업자들이 투자금을 모집하는 것 또한 힘들어질 거란 전망이다.
JTBC는 방송뿐 아니라 K-콘텐츠 산업을 떠받치던 중요한 축이었다. 이런 축이 무너지면 협력사 등의 도미노 위기는 물론 콘텐츠 시장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 상태를 방치하면 K-콘텐츠 산업의 장밋빛 비전도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천혜선 위원은 “광고 규제 완화를 넘어 소유제한 등 시장 구조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관 위원도 “단기적으로는 일단 광고 규제를 빨리 풀어주고 중장기적으로는 좁은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진출을 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제작과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제작하면 망하고 안 하면 살아남는 시장이 돼버렸다”면서 “이 모순을 극복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JTBC가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