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를 위한 여행과 사적인 이유에서 선택한 여행 모두가 마찬가지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돈다는 건 새로운 사람과 음식을 마주하는 일에 다름없다. 지난 30여 년. 아시아와 중동, 유럽과 오세아니아를 여행하며 기억에 남을 몇몇 사람을 만났고, 독특한 요리를 맛봤다. 그 여정을 더듬어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편집자주
스물한 살 때다. 입대를 앞두고 신체 검사장에서 키와 몸무게를 쟀다. 182.8cm, 73kg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함께 신검을 받은 또래 청년 100여 명 가운데 대여섯 번째로 큰 키였다.
아시아는 물론 동유럽을 여행할 땐 그곳 사람들을 올려다본 적이 거의 없다. 반올림해서 183cm라면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작은 키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호주에서 ‘왕창 깨졌다’.
7~8년 전 해양관광 인프라 취재를 위해 호주 브리즈번에 갔다. 퀸즐랜드주의 주도(州都)인 그 도시 지척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아름다운 해변 골드코스트와 고래 유람선 출발지로 유명한 선샤인코스트가 있다.
인천에서 출발해 10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브리즈번공항에 내렸다. 숙소까지 가는 버스를 찾아야 했다. 공항을 청소하는 직원의 웃음이 선량해 보였다. 그리 매끄럽지 못한 발음으로 시내 가는 버스의 정류장이 어딘지 물었다. 그런데, 이것 봐라.
그가 비질하느라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펴고 서니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농구팀 센터를 맡아도 될 키였다. 정류장을 가리키는 손도 조금 과장하자면 솥뚜껑만 했다.
호주 사내들의 우람한 체격은 호텔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운전사의 상체가 한 시절 우리나라 씨름계를 쥐락펴락했던 황대웅이나 최홍만과 비슷하게 보였으니.
그날 저녁. 20년 넘게 호주에서 살고 있는 지인에게 물었다.
“야, 호주 남자들은 죄다 거인 같지 않아?”
“세계에서 평균 키가 가장 큰 나라는 네덜란드라고 하던데”라는 대답에 혼잣말을 했다. ‘그럼 걔들은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괜히 궁금해지는 날이었다.
이틀 뒤엔 또 한 번 ‘크기와 거대함’에 놀라는 일이 있었다.
선샤인코스트 물루라바(Mooloolaba)에서 고래 유람선에 올랐다. 40~50분 가까이 배를 타고 나가며 가벼운 뱃멀미를 했지만, 혹등고래를 볼 수 있다는 들뜬 기대감이 컸다.
그때까지 나는 아쿠아리움에서 재롱 피우는 조그만 돌고래 외엔 실물 고래와 조우한 적이 없었으니.
그리고, 어느 순간 유람선 승객들 앞으로 길이가 족히 10m는 넘어 보이는 고래 2마리가 나타났다. 배에 탄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따개비와 자그마한 갑각류 따위를 등에 붙인 채 느리고 우아한 몸짓으로 바닷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고래의 유영(游泳)은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신비로웠다.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구경할 만했다.
목전에서 고래를 본다는 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와 마주함으로써 스스로의 왜소함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등고래가 저 정도 크기라면 지구에서 가장 크다는 흰긴수염고래(Blue Whale)는 얼마만한 길이와 무게로 인간을 압도할까?’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이 동시에 떠올랐다.
호주 사람의 덩치와 호주에서 본 고래의 크기에 기가 죽었던 브리즈번 여행.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엔 유리창 너머로 짙푸른 바다가 훤히 보이는 괜찮은 식당에 저녁을 예약했다. 호주는 소고기가 맛있다니 스테이크를 주문했고.
한데, 이번엔 스테이크 크기가 또 사람을 놀라게 하네. 한국에선 스테이크 1인분이 대략 150~180g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내 앞 커다랗고 하얀 접시에 놓인 미디엄 스테이크는 300g이라고 했다.
먹기도 전에 질려서 칼질을 미루고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호주인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거침없이 썰어가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겨우 중학생 정도나 됐을까? 나보다 체격이 커 보이는 10대 소년은 스테이크 외에도 오징어튀김과 파스타에까지 쉴 새 없이 포크를 가져갔다. 그 먹성이 놀라웠다.
호주는 남한과 북한 면적을 합친 것보다 35배 넓다고 한다. 두말할 것 없이 큰 나라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주’ 또는, ‘브리즈번’이란 단어가 등장하면 키가 큰 호주인, 거대하고 긴 몸을 가진 혹등고래, 커다란 소고기 스테이크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진다.
맞다. 호주는 모든 것이 다 큰 나라다. 최소한 내겐 그렇다.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전체 목록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