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를 위한 여행과 사적인 이유에서 선택한 여행 모두가 마찬가지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돈다는 건 새로운 사람과 음식을 마주하는 일에 다름없다. 지난 30여 년. 아시아와 중동, 유럽과 오세아니아를 여행하며 기억에 남을 몇몇 사람을 만났고, 독특한 요리를 맛봤다. 그 여정을 더듬어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편집자주
그러니까 2011년 2월6일 오전엔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에 갔었다. 몇몇 역사학자들이 “지구 위에 만들어진 석조 건축물 중 최고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극찬한 사원들.
그때가 세 번째 방문이었다. 캄보디아 시엠립(Siem Reap)은 크지 않은 도시다. 그럼에도 1년이면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앞서 언급한 ‘앙코르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까닭이다. 멀리 떨어진 유럽이나 북미보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국과 중국 여행자가 특히 많다.
앙코르톰 돌기둥 아래서 올려다보는 ‘바이욘의 미소’는 볼 때마다 신비로웠다.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바이욘사원을 축조한 크메르 제국의 통치자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을 본떠 만들었다는 거대한 인면(人面) 조각상.
장구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은 왕의 묘한 웃음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관조(觀照)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 매력에 취해 1시간쯤 바이욘사원에서 서성거렸다. 반가운 손님처럼 나타난 귀여운 캄보디아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짧은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사람은 물론 개들까지 숨을 몰아쉬게 만드는 게 캄보디아의 무시무시한 더위다. 그 폭염을 핑계로 점심도 거른 채 해가 질 때까지 길고 깊은 낮잠을 잤다. 꿈에서 빙그레 웃는 자야바르만 7세를 본 듯도 하다. 깨어나니 배가 고팠다.
이열치열이라 했으니, 낯설고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는 캄보디아 허브와 작지만 혀가 아플 정도의 매운맛을 가진 고추를 잔뜩 넣어 만든 ‘크메르 커리’를 주문했다. 차가운 앙코르 맥주도 함께 청했다.
그것들을 먹고 마시는 도중에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맞은편 테이블 관광객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들었다.
“게리 무어(Gary Moore)가 죽었다고 하던데.”
“그 사람이 누군데?”
짐작건대 둘 중 하나는 블루스와 록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블루스의 선율이 선물하는 우울과 폭발하는 록의 에너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음악 애호가라면 “세상에서 기타를 가장 슬프게 연주하는 사람”으로 불렸던 게리 무어를 모를 수 없다. 나 또한 10대와 20대 시절엔 그의 기타 소리에 열광했던 팬 중 하나였고.
당시에 나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트북 컴퓨터나 태블릿 PC도 없었다. 만약에 있었더라도 여행 가면서 들고 다니진 않았을 터. 여행자의 스타일은 모두 다르다. 업무 출장이 아니라면 인터넷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게리 무어가 왜,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 궁금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즈음 막 시엠립 거리에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 PC방을 찾았다.
한국 신문과 방송도 이미 게리 무어의 사망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네이버와 다음에 접속한 록-블루스 팬들의 설왕설래가 뜨거웠다.
스페인의 휴양지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의 한 호텔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술을 즐기던 게리 무어는 전날에도 폭음을 했고, 심장에 무리가 왔는지 다음 날 깨어나지 못했다. 공식 사인은 ‘수면 중 심장마비’.
허망한 죽음이었다. 시드 비셔스(Sid Vicious)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처럼 20대 요절은 아니지만, 쉰여덟. 얼마든지 더 살아도 좋을 아까운 나이였다.
그날 밤. PC방 허접한 헤드폰을 통해 게리 무어가 연주하는 <파리지엔느 워크웨이>와 <스틸 갓 더 블루스>를 열댓 번 거듭 반복해 들었다. 기타 소리도 주인의 죽음을 통곡하는 듯했다.
‘바이욘의 미소’가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사람들 마음을 흔드는 것처럼, 게리 무어의 기타 연주도 100년, 200년 오랫동안 록-블루스 팬들 기억 속에서 불멸할 수 있을까? 사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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