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故 김선일씨와 AP

박세진 연합뉴스 국제뉴스국 기자



김선일씨 사건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21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피랍상태에서 살고 싶다는 보통 사람의 절규를 들려준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는 저 세상 사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피랍에서 참수피살 시점까지 20여일은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그의 비참한 죽음을 빚어내는 쪽으로만 흐르고 있었다. 여러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깔려 있지만 김씨의 비운을 조장한 책임에서 언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AP통신을 보자. AP통신은 계열인 바그다드 APTN 사무실을 통해 지난달 31일 팔루자 주변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김씨의 실종 직후 모습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제일 먼저 입수했다. APTN은 각국의 TV방송 등에 영상을 전파하는 세계 최대의 영상뉴스통신사이다. 누군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문제의 영상테이프를 막강한 APTN에 줬으나 AP측은 이를 깔아뭉갰다.





김씨를 납치한 세력이 그간의 관행을 깨고 알-자지라 같은 아랍권 방송사가 아닌 APTN에 테이프를 넘긴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테이프에 녹음된 김씨의 발언을 통해 짚어 볼 수 있다.

김씨는 이 테이프에서 부시 대통령을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미국이 이라크인을 살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이 잘못됐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기여도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강력한 동맹인 한국의 국민이 쏟아낸 그런 발언은 이라크 저항세력 입장에서 보면 충분한 선전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저항세력은 `활발한’ 보도를 기대하며 극히 이례적으로 APTN에 테이프를 넘긴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APTN의 모회사격인 AP는 서울사무소를 통해 한국 외교통상부 공보관실 말단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김선일이란 사람이 피랍됐는지 여부를 물었을뿐 바그다드 한국대사관에 문의하는 등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 건성으로 물었으니 부실한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AP의 사후 변명은 김씨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억류돼 있는 지가 불분명해 문제의 테이프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당시는 이라크에서 외국인 인질억류 사태가 잇따라 발생한 후였고, 김씨가 피랍됐는 지를 문의했던 것을 감안하면 AP도 피랍을 의심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AP는 언론사로서의 본분인 진실캐기 작업을 접은 채 의심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세계적 특종을 할 수도 있었는데…. 이 궁금증에 대한 풀이로는 잘못된 상황 판단에다 게으름이 가세하는 등 여러요소가 엮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기저에는 미국인이 관계된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하찮게 여기고 넘어가는 오만함도 한몫 했을 것이다.





알-자지라 방송으로 무장세력의 김씨 참수 경고가 나온 이후 이어진 AP의 보도를 보면 김씨가 자신들이 당초 입수했던 테이프상의 주인공인지를 미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AP는 21일 오전 5시18분 알-자지라를 인용해 바그다드발로 김씨 소식을 긴급기사로 타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김숭일(KIM SOONG-IL)’로 표기했다가 그후 1시간 정도 흐른 오전 6시12분 송고된 기사부터 한국언론 보도에 근거해 김선일(KIM SUN-IL)로 정정했다.

또 김씨의 피랍시점을 참수경고가 나온 21일부터 피살체가 발견된 지 하루가 지난 23일까지 외교통상부 발표와 한국 언론의 애초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6월17일’ 또는 ‘지난주’로 보도했다. 그러다가 24일 오전 5시46분 송고기사에서 슬그머니 `한국인질 5월 말 피랍, 비디오 인질모습 보여줘’란 제목으로 피랍시점을 `5월 말’로 수정보도했다. 아울러 자사가 6월 초 입수한 영상을 토대로 한국 정부에 김씨의 피랍여부를 문의했으나 그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김씨의 사활이 걸렸던 영상을 공개하지 않고 `처박아 뒀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AP가 한국인의 목숨값을 보다 소중히 여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대목이다. AP는 취재관행 운운하며 함구하지 말고 테이프 입수 시점에서부터 공개까지의 전과정을 해명하는 게 뒤늦게나마 정도를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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