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센터, 태평로 25번지의 小史

매일신보에서 프레스센터에 이르기까지



   
   
 
1962년 정부가 서울신문 사옥 사들여 신문회관 건립
1981년 언론단체 사무실 공간 무상공여 조건 요구


최근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단체를 중심으로 프레스센터의 운영권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프레스센터는 길게는 일제시대까지 그 역사가 닿아있다. 프레스센터의 역사를 매일신보 사옥 시절부터 1985년 프레스센터 건립에 이르기까지 각종 자료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다. 본보는 추가로 확인되는 사실이 나오는 대로 계속 기사화할 예정이다.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자리에는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사옥이 있었다.

원래 매일신보 사옥은 지금의 서울시청 터에 자리 잡았다. 1914년 목조건물인 새 사옥을 지어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입주했다.

한차례 화재로 건물 절반이 타버리는 우여곡절을 겪은 이 건물은, 1924년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로 옮기게 된다. 총독부가 서울시청 자리에 경성부청(京城府廳)을 건립하기 위해 양도를 요구한 것이다. 이전 뒤 매일신보는 1939년 원래 경성일보와 같이 쓰던 건물 옆에 따로 사옥을 지어 독립한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22일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 경성일보가 쓰던 사옥에는 코리아헤럴드가 입주했다. 서울신문 사옥은 1960년 4월19일 성난 4.19시위대의 방화로 불탔다. 당시 대표적 여당지였던 서울신문에 시민들의 분노가 터진 것이다. 서울신문이 신축 중이던 새 사옥의 공사도 중단됐다.

신문회관, 언론계 저항 본거지
1957년 관훈클럽,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한국신문발행인협회를 시작으로 부문별 언론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론단체들은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야 했다. 관훈클럽이 젊은 기자들의 관훈동 하숙방에서 창립된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편집인협회도 회의를 열 장소가 없어 서울시청 식당 등을 전전했다. 언론단체들을 위한 공간이 절실한 때였다.

이에 편집인협회는 1959년 12월 신문회관 건립을 발의하게 된다. 4·19혁명 기간 동안 논의는 수그러들었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본격화된다. 1962년 정부는 당시 오재경 문공부 장관의 주도로 1천3백만원을 주고 공사가 중단된 서울신문 사옥을 사들여 완공한 뒤 언론단체들이 설립한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에 양도했다.

신문회관은 지하1층, 지상3층의 건물이었다. 애초 5층 규모로 설계됐으나 예정대로 건설되지는 못했다. 대한뉴스를 보면 1962년 5월5일 개관식에서 언론인 대표로 나선 신문회관 홍종인 부이사장(당시 조선일보 회장)은 “우리들의 훌륭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형식상 신문회관에 건물을 양도했으나 정관에 임원의 선임 등을 문공부 장관의 동의를 거치도록 했다.

당시 초기의 박정희 정권은 언론에 ‘채찍과 당근’ 양면 정책을 썼다. 5·16 쿠데타로 집권하자마자 진보성향의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조용수 사장을 사형했다. 국가재건회의포고를 내고 전국적으로 1천1백70개 언론사를 폐쇄했다. 장면 정권 시절 1백15개에 달했던 일간신문은 1961년 3월에는 38개로 줄어들었다.

한편으로 언론기업의 경영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저금리 자금융자 혜택, 신문용지의 수입관세 인하 및 세제 지원 정책을 내놓았다. 신문의 방송 겸영도 허용해 동아일보가 1963년 동아방송을 개국했다. 정부가 나서 신문회관을 건립해 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단체들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언론 통제를 위해 제정한 언론윤리위원회법에 일제히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신문회관은 언론계 저항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운영은 철저히 언론단체 중심이었다. 1962년 당시 입주단체 중 미8군 공보연락처를 빼고는 모두 무상입주했다. 신문회관은 1967년부터 입주단체들에게 지원금을 나눠줬다. 건립 이후 지급되던 정부의 보조금이 1970년대 중반 끊기는 등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단체들에게 지원금은 계속 지급됐다. 신문회관이 헐리기 직전인 1981년 기록을 보면 기자협회는 1월부터 7월까지 매달 40만원씩 2백8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언론단체 중심으로 자율 운영됐던 신문회관은 사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도시계획에 묶인 3층 건물로는 늘어나는 언론인들의 수요와 시대 변화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정부보조금이 끊긴 이후로는 경영상태도 궁핍해졌다. 자연히 새로운 프레스센터 건립 요구가 이어졌다.
신문협회는 1969년 실제 새 신문회관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신문협회 차원에서 갹출하고 회장단의 모금 운동으로 자금을 댄다는 방안도 제시됐으나 결국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기자협회도 1969년 신문회관 운영 합리화 및 새 회관 건립 추진을 강력히 주장했다.

프레스센터·서울신문 새 사옥 요구
1980년 들어서 프레스센터 건립은 좀 더 구체화됐다. 중앙일보 홍진기 사장이 신문회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신문방송회관 건립’을 내걸었다. 당시 방송협회를 중심으로 제기되던 ‘방송회관 건립’ 요구 움직임도 함께 받아들이려 한 시도였다.

서울신문 새 사옥 건립도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기 시작했다. 서울신문 14대 김종규 사장은 새 사옥을 짓기 위해 국유재산인 서울신문 사옥 남북의 대지 건물을 현물출자로 받고, 신문회관을 사옥 신축 때 별도로 짓거나 신축 사옥 내에 두는 조건으로 지상건물을 매수하는 구상을 하게 된다. 김종규 사장은 ‘서울신문 100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이런 구상을 전했고 “사장만 믿고 그 구상을 수용할 테니 해보라”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술회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서울신문은 1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동석했던 문태갑 당시 사장이 서울신문 새 사옥 건립을 건의했다. 1981년 4월에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언론공익사업의 일환으로 가칭 종합 프레스센터 건립을 계획하고, 다음달 26일 건립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 자리에서 이광표 문공부장관은 프레스센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광표 장관은 나중에 한국언론회관 초대 이사장이 된다. 이로써 서울신문과 프레스센터가 함께 건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건립위원회는 이광표 장관, 문태갑 사장, 허문도 청와대 정무비서관, 이원홍 한국방송공사 사장, 김성진 연합통신 사장으로 구성됐다. 프레스센터는 1982년 4월6일 기공식을 열고 1985년 4월6일 준공식을 치러 현재에 이르게 됐다. 프레스센터의 총 공사비는 4백40여억원이 들었으며 한국방송광고공사는 2백10여억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기본법 제정, 언론통폐합, 언론인 해직 등 언론탄압을 주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요 언론사들에게 이익을 집중시키고 언론인의 후생복지를 지원하는 양면책을 썼다. 1981년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전체 공익자금 지원액 가운데 40.7%가 언론인 국내외 연수, 대학원 장학금 지원, 언론인 자녀 학자금 지원, 주택 및 생활자금 융자 등 언론인 복지후생 지원에 집중됐다. 언론의 대기업화와 독점화가 이뤄진 것도 이때다. 전두환 정권이 프레스센터를 건립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문회관 값은 8천여만원
프레스센터 공사 기간 동안 신문회관에 입주했던 기자협회 등 14개 언론단체는 한국경제신문 별관으로 일시 이전했다. 그에 앞서 신문회관은 1981년 10월 30일 서울신문사와 계약을 맺었다. 신문회관 이종기 이사장과 서울신문 문태갑 사장 이름으로 이뤄진 계약에서 신문회관은 건물가격으로 8천9백19만8천6백원을 받았다.

이 계약서 7조에는 ‘서울신문사는 신축될 프레스센터 지분중에서 한국신문회관이 필요로 하는 사무실 (220평 이상)을 확보할 수 있도록 주선할 것을 약속한다’고 나와있다. 이때 입주단체들은 문공부 장관 앞으로 건의서를 보내는데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의 기본 재산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새로 건립될 프레스센터에 신문회관(각 입주 언론단체 포함)이 필요로 하는 스페이스(평수)를 무상으로 공여한다는 확약을 받는 조건으로 현 회관을 양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식적으로 승인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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