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언론통제와 오늘의 반성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와 국방부 과거사위가 보고서를 통해 밝혀낸 과거 국가기관에 의한 언론통제에 대해 우리 언론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 국가기관들이 이렇게도 철저히 언론을 유린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삼 경악한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번에 국가정보기관이 1960년대~80년대 사이 개입한 모두 14건의 언론통제 사건에 관한 진실을 발표했다. 그 목록을 보면 △신동아(1969년) △사상계(1970년) 등 필화사건의 진상을 비롯해 △부일장학회 사건(1962년)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1965년) △김대중 납치사건 및 언론조정(1973년) △조선일보 기자 강제 해직사건(1974~75년) △보도지침 및 정보기관의 언론사 출입·상주(1970년대~80년대) △평화의 댐 관련 언론조정(1986년) △신동아-월간조선 제작방해 사건(1987년) 등이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위는 80년 신군부 보안사에 의한 언론통제 실상을 적나라하게 공개했다.

위에 기록된 언론탄압사건들은 ‘중정’(중앙정보부)과 보안사 등 국가기관이 언론을 짓밟은 굴절된 역사를 보여준다. 일부 신문들은 이번 조사를 보고 자사와 관련 있는 사건들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정권에 비판적인 자사의 보도에 대해 정보기관이 광고게재를 막는 탄압을 가했다고 보도했다. 또 중앙일보는 TBC(동양방송)의 통폐합이 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요됐으며, 오홍근 중앙경제 부장이 테러공격을 당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 정보기관의 언론탄압은 자사의 사건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된다. 언론계 전반에 통제가 가해졌던 만큼 언론자유 침해 차원에서 폭넓은 조명이 필요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현재까지도 한일간 외교문제가 되고 있다. 중정은 이 사건을 일으킨 후 기사를 축소하고 제목을 키우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세세하게 보도통제를 실시했음이 드러났다. 중정은 외신의 취재를 통제하고, 국내언론의 외신 인용보도도 통제했다. 중정은 당시 ‘보도지침’을 갖고 있었고, 이를 근거로 언론을 통제했음이 드러났다.

‘금강산댐 위협 보도’는 북한이 금강산 댐을 만들어 폭파시키면 서울 여의도가 침수될 것이라는 조작 보도였다. 당시 관계자들은 언론사가 무엇을 취재했으며, 어떻게 보도했는지 조사해 ‘홍보 실적’을 평가했다는 놀라울 뿐이다. 이 조작된 보도를 근거로 “대항 댐을 만들자”면서 성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엄청난 사기극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신군부는 그들에게 저항했던 언론인들은 강제 해직하고 해직된 이들이 취업도 하지 못하도록 제한 조치를 가했다. 보안사는 해직만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잔인한 짓을 했는지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태가 놀랍다. 게다가 보안사의 준위에 불과한 자가 서울의 여러 신문의 ‘사실상 편집국장’을 노릇을 했던 과거는 참으로 회상하기도 싫다.

여러 언론사가 탄압받던 그 시절 기자협회도 탄압을 받았다. 기자협회보가 1973년 6월 22일자 3면에 리영희 한양대 신방과 교수의 기고 ‘신문은 하나 둘 사라지는데…’를 싣자 중정은 박기병 회장과 기자협회보 정진석 편집장, 리영희 교수를 연행하고 “사전검열을 받겠다”는 서약을 강요했다. 1974년 10월 25일 기자협회가 민주언론수호결의 성명을 발표하고 1975년 3월 8일 조선일보 경영진의 무더기 기자파면을 보도하자 이틀 뒤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들어 기자협회보를 폐간시켰다. 협회보가 법정 시설기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를 댔다.

이처럼 언론 탄압이 자행되고 있던 당시 일부 언론계 인사들은 앞장서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찬양했다.

우리는 불의에 저항한 떳떳한 역사와 함께 이런 부끄러운 역사도 갖고 있다. 권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는 자랑스럽게 이어받고 아부의 역사는 가슴깊이 참회하자.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강제 통폐합은 공권력의 위법 행위다. 정부는 늦었지만 언론통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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