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을 되새기며 옷깃을 여민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반공과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현대사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이끌어냈던 행동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이 8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은 생전 자신의 7할은 언론인이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자’라고 규정했다.

‘기자’ 리영희는 1961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을 동행 취재하면서 동료 기자들이 박정희 외교의 성과를 선전할 때, 미국 측이 조속한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사태 협력을 촉구했다는 ‘진실’을 보도했다.

그 대가는 취재현장에서의 ‘조기송환’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고 군부독재 반대 지식인 성명에 참가해 여러 언론사에서 해직 당했고 이후에도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가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현실의 상황을 묵인하고 회피하거나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성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던 삶은 그 자체로 형벌이었다”고 선생은 대담집 ‘대화’에서 회고했다.

진실의 목도자로 반세기 외길을 걸어온 리영희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언론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가 범죄자들이나 쓰는 대포폰으로 민간인을 사찰하며 시민의 인권을 유린해 온 정황이 드러나고, 권력이 언론을 협박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현실.

자본과 권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오그라드는 현실 앞에서 이를 목도한 ‘기자’ 후배들이 어떤 진실을 세상에 알리며 ‘파수꾼’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신문이 종합편성권 허가를 얻어 방송에 진출하기 위해 권력과 배를 맞댄 현실을 ‘보수언론과 이명박 권력의 화간’이라고 규정했던 선생. ‘권력에 아첨해서 자기의 사리를 채우는 그 사주나 그런 글을 써서 출세한 신문사와 방송국의 간부들이나 다 반성하라’던 수년 전 선생의 일갈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리 선생은 민족의 통일을 일생의 화두로 삼고 이를 향한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공영을 주창해 왔지만 현 정부 들어 급속도로 냉각돼 온 남북관계는 마침내 선생의 임종을 며칠 앞두고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라는 국지전의 형태로 정점에 도달했다.

쌍방의 군사적 충돌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까지 악화된 남북 관계와 이 같은 결과를 잉태한 정부의 강경 일변도의 정책에 언론의 방기와 부추김은 없었는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우리는 선생이 꿈꾸던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는 세상에 여전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언론인의 역할과 소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선생의 임종 앞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시대의 기록자이며 정직한 목격자인 ‘기자’들의 역할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지성인은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서 “지성인은 인간정신을 탐사하는 동시에 거리의 투사가 돼야 한다”는 말로 양심이 이끄는 지성인의 행동을 촉구했다.

2010년, 선생의 임종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기자’ 후배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저 옷깃을 여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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