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사태로 불거진 교육 이슈

[언론다시보기] 정진영 영화배우


   
 
  ▲ 정진영 영화배우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문제를 둘러싼 여러 논란이 여러 날 동안 언론의 주요 기사로 널리 알려졌고, 공중파 방송의 시사토론 주제로 채택될 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끈 사건이었습니다.

해당 대학이 현재 갖고 있는, 이른바 성적불량자의 차등 등록금제(성적 불량을 판단하는 기준이 참으로 높아 객관적으로 성적불량자라는 단어를 붙여도 되는지 의문입니다)나, 영어전용강의제도 등의 객관적 문제점은 다양한 매체에서 이번 사건의 배후 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 등을 카이스트 역량 강화의 수단으로 제시했던 현 총장의 학교 운영에 대한 문제제기도 여러 통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카이스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이고, 그 입학생은 여러 해 동안 중등교육과정에서 ‘영재’로 불리며 특별한 교육을 받아오던 학생들이기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전에도 이른바 명문대생의 자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주제였지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선택한 젊은이들의 죽음은 구체적 요인이 무엇이든 간에 평범한 우리들을 충격에 몰아넣습니다.

카이스트의 현 교육정책을 둘러싼 논쟁은 해당 대학의 교육 주체들이 연일 뜨겁게 토론을 하고 있고, 현재로서는 객관적으로 문제가 된 쟁점을 구조적으로 보완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치열한 대입경쟁, 대입입시 준비의 장으로 전락한 공교육현장, 그 틈새에서 심지어 아파트 값까지 좌우하는 사교육 시장,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실업의 문제 등.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다면 어느 하나 밝게 보일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을 둘러싼 조건은 그들에게 밝고 창의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하기 힘듭니다.

카이스트의 이번 사건은 우리 교육 시스템이 안고 있는 문제점의 발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른바 경쟁을 최우선시하는 교육 시스템,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상실되어 가는 한국 사회정체성의 혼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입시제도는 우리 사회가 몇 십 년동안 계속 안아 온 문제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대학생들의 자살로 시작했지만 사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논의의 수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흑백논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느 사회나 이견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존재하고 서로 충돌하는 논리가 사회 도처에서 갈등을 빚어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수렴하는 능력이겠지요. 이른바 좌,우 혹은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은 한 사회의 정치지형도를 나누는 데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문제를 관찰하고 논의를 수렴하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편과 상대편으로 편을 가른 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은 악과 오류의 산물로 몰아버리는 지성체제에서 이견은 곧 선전포고와 다름없습니다. 그러한 사고 기반에선 이견자는 적에 불과하지요.

자신이 속한 대학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대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교육행정가의 포부와 일반 교수와 학생의 의견 충돌이 이번 사건 이전에는 없었겠습니까.

문제는 그러한 이견들을 서로 이해하고 사고의 폭을 좁히려는 노력들이 부족하거나 아예 부재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늘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밀어붙이고, 그 반대편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종식시키기 전에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합니다. 그만큼 장기적으로 봐야 하고, 또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계획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겠지요. 혁명기라면 한번에 모든 것을 잡을 수 있는 거친 방법론이 통하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를 혁명기라고 볼 사회적 증험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 지형으로 교육을 판단하는 사고잣대야말로 교육을 논할 때 가장 금해야 할 사항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아이들의 무상 급식 문제마저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저열한 정치판도에서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순진한 설득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그야말로 자신의 당파성을 버리고 서로 귀를 열고 접근해야 할 우리의 근간입니다. 이번 카이스트 사건은 해당 대학의 정책 문제 논란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 교육 전반의 문제제기와 논의로 상승시켜야 하고, 그 임무는 사회 어젠다를 창출하는 언론에 주요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의 창출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비롯되지만, 의제설정의 창출은 사회 전반을 꿰뚫는 사고 속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언론이 그러한 방향으로 기사를 잡고 뉴스 수용자에게 의견을 전달했지만 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우리가 평생을 두고 이야기해도 완벽한 제도라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일 것입니다. 부탁건대, 기자 여러분! 뉴스 수용자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자신이 속한 매체의 당파적 성격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우리 자식이 속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매일매일 써주십시오.

화제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교육 문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언론을 한 중학생의 아비인 저는 기대합니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죽일 수는 없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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