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보도에 '관용'은 없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1.06.07 11:08:40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공동기획한 인권보도 시리즈가 기자협회보에 연재된 뒤 동료 기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무심코 써온 표현이 인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면에 싣기 전까지 취재기자에서 시작해 데스크와 편집, 교열기자들까지 3중, 4중의 절차를 거치면서도 표현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언론의 인권 무관심을 절감케 한다. 이번 기획보도를 통해 언론이 얼마나 공공연하게 ‘언어폭력’을 저질렀는지 자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리즈가 연재되는 와중에도 인권을 경시하는 표현이 신문과 방송에 보란 듯이 실렸다. 어떤 표현이 문제가 되고 왜 인권을 침해했는지 짚어보자.
지난달 말 한 방송은 ‘‘절름발이 서울’ 6개월만에 정상화되나’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6개월간 대립한 서울시장과 시의회가 관계 정상화를 모색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절름발이’란 표현은 장애를 빗대어 부정적인 내용을 묘사한 것으로, 장애는 비정상이라는 편견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눈뜬장님’이나 ‘꿀먹은 벙어리’같은 표현도 인권보도 원칙에 어긋난다.
지난주에는 한 일간지에 ‘‘미혼모 지원정책 개선방안 포럼’ 개최’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회에서 여는 포럼의 명칭이라 하더라도 ‘미혼모’는 잘못된 표현이다. 남성을 지칭하는 명칭이 없는 성차별적 표현이다. 사건기사에 많이 나오는 ‘여고생’ ‘여교사’ 등 ‘여’자를 접두어로 사용한 단어도 반드시 남성과 구별할 필요가 없다면 피해야 한다. 남성을 기준으로 여성은 예외라는 뉘앙스를 갖기 때문이다.
‘꿀벅지’라는 표현은 연예뉴스에 거의 매일 나오다시피 한다. 성적, 신체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성적 대상화하는 표현도 성차별적이다. 쓰지 말자.
요즘 물가가 오르면서 ‘알뜰 장보기’와 같은 기사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 여기서 ‘장보기’도 성차별적 표현이다. 가사노동이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성역할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중국인 테니스선수 리나가 아시아 국가 선수로는 처음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했는데, 거의 모든 언론사 기사에 ‘황색 돌풍’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굳이 ‘황색’이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다. 피부색을 강조한 표현은 백인 중심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스포츠뉴스에는 ‘용병’이라는 표현이 거의 매일 나온다. 특히 프로야구 기사에서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용병’은 사람을 사고파는 물건 취급을 하는 표현이다. 그냥 외국인 선수라고 쓰는 게 옳다.
일부 기자들은 ‘관용적인 표현’에 대해 지나치게 재단한다고 불만을 가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고쳐 쓸 수 있는 표현으로 인해 장애인과 여성 그리고 외국인들의 인권이 침해받는다면 고쳐 쓰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는 보도에선 ‘관용’을 따질 수 없다. 늦은감이 있긴 하지만 기자협회가 인권위와 함께 인권보도준칙을 만든다고 하니 다행이다. 특히 인터넷기사의 선정적인 제목을 근절하는 차원에서 준칙을 상습적으로 어긴 언론사에 제재를 가하는 방법도 고려해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