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대법원서 판결하는 슬픈 사회
[언론다시보기] 신경민 MBC 논설위원
신경민 MBC 논설위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1.09.19 10:04:29
|
|
|
|
|
▲ 신경민 MBC 논설위원 |
|
|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은 1964년 나왔다. 4년 전, 원고인 알라바마 주 몽고메리 시의 설리번 경찰서장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 뉴욕타임스 광고에 나옴으로써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위학생을 막기 위해 대학식당을 폐쇄한 적이 없고 흑인 지도자인 킹 목사와 가족을 위협하려는 목적으로 시위대에 폭력을 조장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 광고에는 그 밖에 허위 사실이 많다고 열거했다.
설리번의 주장은 대체로 맞는 것으로 확인됐다. 뉴욕타임스의 자체 기사를 검색한 결과도 그랬다. 광고 실무자는 급한 상황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고 광고주인 흑인 인권단체와 주도자를 존경해 그대로 실었다고 증언해 뉴욕타임스는 곤경에 몰렸다. 알라바마주 대법원은 당연히 뉴욕타임스에 실린 허위사실로 명예가 훼손됐으며 50만 달러를 물어내라고 판결했다. 당시 흑백차별의 분위기에 따라 비슷한 사건이 몰려 있어 뉴욕타임스에 5백만 달러, CBS에는 2백만 달러 이상의 줄소송이 이어지게 됐다. 진보적 언론사는 천문학적 배상으로 문 닫을 날을 받아 놓은 셈이었다.
美연방법원 “주장광고, 헌법의 근거에 서야”유일한 희망은 연방 대법원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심리를 해달라고 문을 두드리자 대법원은 예상을 뒤집어 “예스”라고 답했다. 명예훼손 민사사건에 대해 언론이 관련된 경우 보통법이 아니라 연방 헌법적 사안이라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다 받아놓은 밥상을 위협받은 설리번 측은 광고는 기사와 달라 대법원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상업광고가 아닌 주장광고(Editorial Ad)는 헌법의 근거에 서야 한다고 물리쳤다. 조용한 예스였지만 천둥과 같은 소리였다.
문제는 허위 사실이 포함된 언사였다. 대법원은 허위가 포함된 사실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판결문을 대표 집필한 브레난 대법관은 “자유로운 토론에서 잘못이 들어간 언사는 불가피하다. 표현의 자유가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숨 쉴 공간’을 가지려면 보호받아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엄청난 배상액을 인정할 경우 언론은 두려움과 소심으로 굴복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언론에 무제한으로 자유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유명한 ‘공인이론’으로 공인의 경우에는 언론이 ‘사실상의 악의(Actual Malice)’를 가졌다고 입증된 경우에만 책임을 지도록 인정했다. 실무적으로는 그동안 언론이 명예훼손의 피해가 없다고 입증을 해온 데 반해 이제는 피해를 주장하는 공인이 사실상의 악의를 입증해야 하도록 공수가 바뀌었다.
위의 설명은 교과서를 옮긴 것이다. 이 판결은 세계적으로 언론과 공적 사안이 얽힌 명예훼손 사건에서 부동의 모범답안이자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법원도 대륙법 체계라는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이 취지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이 판결을 길게 다시 설명한 이유는 이 같은 기초와 기본, 상식을 거부하는 곳이 우리 사회의 힘 있는 구석구석에 존재할 만큼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원재판부로 돌린 대법원, 힘들었을 것”PD수첩 사건에 대한 최근 대법원 판결은 뉴욕타임스 판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판례가 충분히 쌓여 있는 민사사건을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대법원 전원재판부에 돌릴 수밖에 없었던 점을 보면 대법원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힘들었는지 느낄 수 있다. 상식적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반대 목소리를 낸 소수의견 대법관이 만만치 않은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민사사건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검찰은 기어코 기소함으로써 상식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수사 검사가 기소는 물론 수사가 어렵다는데도 검찰 수뇌부는 수사팀을 재구성해 기소한 뒤 거듭된 무죄 판결을 무릅쓰고 대법원까지 올렸다.(문제를 제기한 부장검사는 사표를 냄으로써 검찰 사상 드문 사태가 벌어졌다.)
일부 언론은 법원이 프로그램에 나타난 허위 사실을 인정했다고 보도함으로써 본말을 뒤집었다. 만약 대법원이 반대 결론을 냈다면 언론은 사실확인을 하기 어려워 언론역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반상식, 몰상식은 원고와 그 뒤에 숨은 힘의 막강함과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혹시 PD수첩 프로그램이 민사사건으로 다룰 수 있다면 “PD수첩 팀에 사실상 ‘사실상의 악의’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개과정을 보면 그 같은 논리적 고민은 찾아 볼 수 없고 힘의 논리만이 보인다.
조직이 큰병에 걸렸음을 보여준 MBC어처구니없음의 절정은 프로그램과 신문광고를 통해 사과한 피고이자 피고인인 MBC가 찍었다. 사실 확인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지만 본말이 뒤집어진 생뚱한 느낌을 준다. 결정과정을 보면 사장이 급거 귀국해 긴급회의를 하고 보도국은 편집회의를 거치지 않은 채 밀실에서 뉴스 꼭지를 결정한 뒤 당사자가 아닌 기자까지 동원해 크게 뉘우쳤다. 조직의 위아래가 단단히 큰병에 걸렸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상식의 거부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 보인다. 합리적 상식의 회복이고 방법은 환부를 치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