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김진숙 그리고 언론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1.11.09 14:57:10
41년 전 늦가을, 전태일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불길 속에 몸을 던졌다.
대표적인 노동집약 산업인 봉제공장에서 당시 10대 소녀들은 안질과 신경통, 위장병에 시달리며 하루 16시간이라는 참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경제는 이런 노동자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전태일은 그런 현실을 죽음으로 고발했다. 수출과 성장 이면에 놓인 노동자들의 막대한 희생은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비로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던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에서 우리는 부산 한진중공업의 타워크레인에서 두 번째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의 죽음이 그러했듯 김 위원은 1년 가까운 시간을 까마득한 공중의 쇳덩어리 타워크레인 속에서 보내는 개인의 희생으로 우리 사회가 ‘정리해고’ 문제를 비로소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언론종사자로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킨 것은 언론이 아니라 김진숙 위원과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점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문제에 기득권 언론이 그나마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희망버스의 출현이나 이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과의 충돌 등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나마도 공중파 뉴스를 비롯한 상당수의 언론은 이 사안을 충분히 다루지 않거나 경찰과 일부 시민의 충돌 정도로 축소 보도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크다는 일부 신문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을 ‘크레인 하나에 부산이라는 대도시가 점령됐다’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비단 한진중공업 사태뿐이 아니다. 집회와 파업 등의 노동문제를 다뤄왔던 그동안 언론의 태도가 기업을 다루는 태도와는 사뭇 달랐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임금을 포기하면서까지 파업을 할 때, 언론은 고액 연봉자들이 염치도 없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한다거나, 자신들의 이기적인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불법을 서슴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적이고 선정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방송사들의 경우 파업과정에서의 충돌이 방송 화면상의 이른바 ‘그림’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차원으로 노동문제를 다뤄왔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언론의 보도에서 노동 분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심각하게 부족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통계청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이 600만 명에 달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노동과 자본의 문제, 양극화 문제는 국경을 넘어 이제 사회가 존속되기 위한 최우선 현안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전태일의 죽음 이후 수십 년이 흘렀지만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에서 볼 수 있듯 노동자들은 아직도 스스로 목숨을 던지며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의 죽음 앞에서 언론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문제를 대하는 언론의 책임과 과제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고 스스로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