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를 부정하는 사람들

[스페셜리스트│경제] 곽정수 한겨레21 기자·경제학 박사


   
 
  ▲ 곽정수 한겨레21 기자·경제학 박사  
 
“경제와 민주화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전경련의 외곽단체인 자유기업원의 주장이다. 전경련은 재벌의 이해를 대변한다. 따라서 ‘경제민주화’의 부정은 재벌 전체의 의견을 반영한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이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정책을 쏟아내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재벌의 이런 생각은 현행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헌법 119조2항은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대한민국은 헌법 119조1항의 내용대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바탕이지만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방임은 아니다. 국가는 국민경제 균형, 소득분배, 경제권력 제동 등을 위해 시장에 개입할 책임이 있다.

헌법은 물론 성역이 아니다.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를 맞아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안을 시행했을 때 일각에선 위헌 주장이 제기됐다. 헌법이 행정부에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큰 힘을 얻지 못했다. 미국은 우리처럼 헌법에 경제민주화에 관한 별도의 명문화된 규정이 없지만 정부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분명하다.

경제민주화의 화두는 재벌의 탐욕으로 인한 폐해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의 결과다. 재벌은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으로서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경제력 집중,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골목상권 잠식, 불공정 하도급거래, 일감 몰아주기 등은 결국 양극화 심화, 중소기업 및 영세자영업 고사, 중산층 붕괴로 이어졌다. 재벌당으로 불려온 한나라당조차 당명을 바꾸고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 항목을 신설했다. 경제민주화의 부정은 재벌의 현실인식이 사회와 큰 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경제민주화는 전 세계 자본주의 위기와도 맞물려 있다.

재벌은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대책을 ‘선거용 대기업 때리기’라고 반발한다. 일부 친재벌 언론들도 “정치인들이 표를 얻으려 대기업의 탐욕을 과장한다”며 부채질한다. 이는 재벌의 안이함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인 진실도 담고 있다.

한국은 1987년 6·29 항쟁으로 30여 년 간의 권위주의 체제를 넘어서며 정치 민주주의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또 정부 주도의 산업화에 힘입어 경제권력이 된 재벌의 독주를 막기 위해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명시했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재벌의 힘은 더욱 커진 반면 정부는 이를 적절히 통제해 사회 전체의 균형과 상생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정치권은 선거 때만 되면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내세웠지만, 선거가 끝나면 손바닥을 뒤집었다. 쉽게 말해 학생(한국)이 상급학교 진학(선진국 진입)을 위해 꼭 풀어야 하는 숙제(경제민주화)를 계속 미루면서 재수·삼수의 악순환을 거듭한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공수표가 어렵게 됐다. 경제민주화가 단순한 이념논쟁이 아니라 국민의 생존이 걸린 절박한 현실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양극화 심화 속에서 친재벌이라는 시대착오적 공약을 내건 이명박 정권은 2009년 4·29 재보선과 2010년 6·2 지방선거의 잇단 패배로 무너졌다. 하지만 차기정권은 누가 집권을 하든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더 단명에 끝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가자. 자유기업원의 누리집에 들어가면 지난 1997년 최종현 당시 전경련 회장이 설립목적을 밝히고 있다. 바로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다. 전경련과 자유기업원은 지금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