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다이의 김정수 리더십
[스페셜리스트│외교·통일]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외교안보팀장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3.28 16: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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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외교안보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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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재단의 김정수 이사는 얼마 전까지 일본 센다이(仙台) 주재 한국 총영사였다. 그는 지금도 지난해 3월 11일 오후 2시46분 이후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진도 9.0의 지진과 쓰나미가 덮친 후 하늘이 검게 변했다. 바람이 불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까마귀가 울어댔다. 센다이 시내는 구급차 소리로 뒤덮였다. 관내 피해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인 오후 5시쯤이었다.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 총영사관을 찾아왔다. 지진으로 부서진 집에서 간신히 어린 아이만 데리고 피신한 교포였다. 이어서 지진으로 거처(居處)를 잃고 공포 상태에 빠진 200여 명의 교포와 한국인 유학생, 관광객들이 총영사관으로 몰려들었다. 땅에서는 지진, 바다에서는 해일, 공중에서는 방사능이 위협하고 있었다.
육사(陸士) 출신으로 1982년 외교관이 된 그는 ‘전시(戰時)상태’에 돌입했다고 판단했다. “3일 내에 피난민들을 먹고, 재우고, 안심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장 24시간 비상근무태세에 들어갔다.
공관원들을 인근의 편의점, 식당에 보내 식량을 확보했다. 식당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교포를 통해 프로판 가스와 솥 등 주방도구를 마련했다. 직원들을 새벽에도 주유소로 보내서 유류(油類)를 비축했다.
총영사관에 위기가 닥친 것은 본부에서 보낸 신속대응팀이 도착한 3월 13일이었다. 사태 3일째 신속대응팀이 파견됐지만 피난민들의 기대가 동요(動搖)로 바뀌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신속대응팀이 자신들을 싣고 갈 대형 버스 수십 대를 가져 올 줄 알았다. 전세기가 곧 도착할 줄로 믿고 있었다.
공황(恐慌)상태인 이들에게 작은 버스 1대에 타고 온 7명의 신속대응팀은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방사능 공포는 커지고 있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어 보였다. 외부로의 이송(移送)이 늦어질 것 같자 불안해진 교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4일 자정이 지난 0시30분, 김 총영사가 결단을 내렸다. 한국에서 파견된 이수존 신속대응팀장(현 주요코하마 총영사)을 비롯한 12명의 외교관을 피난민들 앞에 서게 했다. 막 잠자리에 든 피난민들에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당장 움직일 대형 교통수단도 없고, 전세기도 오지 않는다”며 총영사관에서 할 수 없는 일을 분명히 알렸다. 그 대신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테니 공관 직원들을 믿어달라”고 했다.
피난민들은 한밤중에 강당에 도열한 외교관들의 진심어린 호소를 믿고 따라줬다. 그후 4월27일까지 총 48일간 총영사관이 피난소로 활용하는 동안 큰 동요는 없었다. 두 달 가까이 계속된 비상상황에서 총영사관의 활동과 관련한 잡음이 거의 없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권철현 전 주일대사는 그의 저서 ‘간 큰 대사, 당당한 외교’의 첫 부분에 센다이 총영사관과 관련된 이야기를 썼다. “김정수 총영사의 부인은 자신도 지진을 피해 15층에서 1층까지 맨발로 도망쳐 성한 몸이 아닌데도 앞장서서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일했다. 직원들도 자신의 집에 있는 물품까지 다 가져와 피난민들에게 나눠주며 살신성인하는 자세로 뒷바라지를 했다.”
알음알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센다이 총영사관의 활동에 감명받은 영산재단은 최근 ‘2011년 올해의 외교인 상(賞)’을 이 공관에 수여했다.
미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의 인기과목 중 하나는 위기상황에서의 리더십이다. 이 학교 관계자를 만나면 피난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疎通)으로 위기를 극복한 ‘센다이의 김정수 리더십’을 연구해보라고 권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