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교향악단에 대한 단상

[스페셜리스트│문화] 김소영 MBC 기자·문화부


   
 
  ▲ 김소영 MBC 기자  
 
“실력이 없다.” “따라주지 않는다.” 상임지휘자 함신익과 단원들의 갈등으로 파행중인 KBS교향악단 사태가 법정에 오르는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KBS는 함 감독이 악단 단원 7명에 대해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으며, 법원에 업무방해 가처분신청도 냈다고 밝혔다. 지난 2010년 함 감독 취임 이래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 KBS교향악단은 정기 연주회가 두 차례 취소됐고, 급기야 KBS이사회가 “100억원에 달하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 취소와 파행은 공영방송 공적책무의 포기”라며 “전면 물갈이나 법인화 전환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을 정도이다.

교향악단은 참 묘한 조직이다. 지휘자가 관객의 시선을 거의 독차지하지만 단원 한사람 한 사람이 지휘자만큼 음악 실력을 갖고 있다. 대체로 5,6살 때 악기를 잡기 시작해 석사 이상의 학력을 소유하고 있고 해외 유학파는 부지기수다. 음악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첼리스트 출신 지휘자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도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지휘자의 모습이, 연주자들을 가장 화나게 만듭니다. 아까운 시간만 도둑질해 가는 꼴이죠”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이 없이 보여서도 안 되는 존재, 나 잘났다는 연주자 수십 명을 잡음 없이 통솔해야 하는 존재가 지휘자니,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총보에 따라 작품의 소리를 자기 식으로 뽑아내야하고, 동시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어디에선가 지적해놓은 것처럼 “의도적으로 방해하려는 연주자들의 거만함”에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악단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조직적인 단체에 비해 훨씬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지휘자의 압도적인 권위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한때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단원을 쓰러지게 할 정도의 독설로 유명했던 말러일 것이다. 후임자 토스카니니는 말러보다 더 거칠었다. 한번은 지휘봉을 던져 연주자의 눈을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토리노 법원은 “예술가의 성스러운 광란”이라며 벌금형도 부과하지 않았다. 조지 셀이나 카라얀, 번스타인은 이 성스러운 광란을 최대한 누린, 그러니까 악단의 운영과 레퍼토리 선정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종신직을 수행한 20세기의 마지막 지휘자였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는 법. 당연히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위상에도 변화가 왔다. 탈권위, 강요하지 않는 권위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유럽의 몇몇 오케스트라는 단원들의 합의에 따라 지휘자를 추대하고, 지휘자는 단원들의 음악 해석을 최대한 존중하고 조율한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부활을 이끈 마이클 틸슨 토머스나 베를린 필하모닉이 선택한 사이먼 래틀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관계의 바람직한 21세기형 모델을 보여주며 이들 교향악단의 제2의 부흥을 선도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도 줄고, 클래식을 향유하는 시민들도 줄고 있는 상황에서 악단과 지휘자가 택해야 할 관계는 자명하다. 

KBS교향악단의 사태는 어찌 보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한국판 진통이다. 연간 예산 100억원의 한국 대표 악단으로서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비전이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생각의 공통분모가 없으니 갈등은 필연적이다. 유럽의 교향악단들처럼 시대적 발전을 차근하게 밟지 않은 데다 예술에 대한 사회와 일반인의 이해도 깊지 않아 필요한 변화가 전쟁처럼 매우 고통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다. 시시비비를 가려 해결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느낌이지만 골이 깊으면 산이 높고,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만 남았다. 서울시향과 양대 산맥을 이루며 한국 클래식의 중흥을 가져올 KBS교향악단의 재탄생을 음악팬으로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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