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의회 움직인 척추 장애인
[스페셜리스트│외교·통일]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외교안보팀장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5.23 15: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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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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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에 대한 스테디셀러 책 중에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 의회’가 있다.
조선일보의 송의달 위클리 비즈(Weekly BIZ) 에디터가 워싱턴 DC에서 연수할 때 미 연방의회를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학계에서도 꾸준히 인용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미 의회의 결정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미국의 입법부 차원을 넘어 ‘세계의 입법부’나 마찬가지”라고 규정한다.
또 “한반도 통일과정이나 동북아 국제정치 역할 구도에서 미국 의회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山)이자 주체적으로 활용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이 책 제목대로 미국 밖으로 발산되는 미 의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나라가 워싱턴 DC의 연방의사당을 주목하고 있다. ‘더 힐(The Hill)’ 등 미 의회의 움직임을 보도하는 신문만 10여 종류가 있을 정도다.
바로 이런 중요성 때문에 2007년 7월 미 하원이 일본군 성 노예(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 일본 정부가 전방위로 나서서 이를 막으려고 했다.
일본의 가토 료조(加藤良三) 주미 일본대사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에게 “결의안이 채택되면 일·미(日美)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미 의회의 영향력에 일찌감치 눈을 돌린 이가 이미일 6·25 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은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것을 지켜보며 “미 의회에서 납북자 결의안을 통과시켜 북한의 납북 범죄를 국제사회에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국내 기반을 튼튼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2010년 국회에서 납북자 특별법이 통과되도록 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법에 따라 만들어진 납북자 진상 규명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미국 의회를 접촉했다.
그 결과 지난해 6·25 전쟁 참전용사 출신의 찰스 랭겔 하원의원을 움직여서 미 하원에서 ‘한국전 국군포로, 실종자 및 납북자 송환’ 촉구 결의안을 이끌어 냈다.
이 이사장은 그 과정에서 북한으로부터 인간쓰레기로 비난당하며 협박을 받았다. 북한 측 인터넷 홈페이지인 ‘우리민족끼리’는 “민족을 등진 이 인간쓰레기들은 불순한 목적 밑에 납북자결의안이라는 것을 고안하고 서푼짜리 광대극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정부 일각에서는 “굳이 미국까지 납북자 결의안을 가져갈 필요가 있느냐”며 시큰둥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 의회의 결의안은 납북자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다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를 미 의회에 소개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이 결의안을 토대로 유엔 인권위원회에 납북자 문제 조사위를 구성토록 요구하겠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캐나다, 영국, 호주 등 6·25 참전국과 주요 우방국 의회에 유사한 결의안 채택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미 하원에서 납북자 결의를 채택했으니 당신들도 도와달라”고 하면 모른 척할 수 있을까.
한국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전시(戰時)·전후(戰後) 납북자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는 첫 발걸음이 평생을 한(恨)을 갖고 살아온 135㎝의 척추 장애인에 의해 시작됐다.
23일 한국을 방문하는 로스레티넨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이 이사장을 만나 그의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할 계획이라고 한다. 장애인의 몸으로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납북자 문제를 주목받게 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