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에는 세계관과 철학이 없다

[언론다시보기]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성폭력과 성추행 범죄가 여름철에 늘어났다면 어떻게 기사를 쓸 것인가? 여성의 노출이 많아지니 당연히 성범죄가 늘어난 것이라고 쓸 것인가? 그것은 마치 콧물이 흐르더니 감기몸살에 걸리는 걸로 봐서 콧물이 감기의 원인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오류이다. 여름에 성범죄가 늘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노출 때문이기보다는 밤늦게까지 집 밖이나 야외에 머물고, 밤에도 문이나 창문을 열어 놓는 계절적 특성 때문이다. 여름철 성범죄 피해자의 연령대가 10대나 20대에 몰리지 않고 다른 계절과 비교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봐도 알 수 있다. 조금만 더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사안이다.

어떤 사회 현상의 결정적 원인이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빼버린 채 연관성이 적은 것을 원인과 결과로 이어 붙이는 걸 ‘결합효과의 오류’ 또는 ‘공통원인 무시의 오류’라 부른다. 사회범죄가 벌어지는 데는 사건마다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물론 공통된 배경도 있다. 각각의 범죄가 갖고 있는 배경과 특수한 상황, 공통된 사회적 배경을 일일이 파악하려면 복잡하고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도 스트레스라면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상의 원인을 간단한 몇 가지로 몰아감으로써 복잡한 사유로부터 빠져나가려는 본능을 보인다. 사회심리학에서 ‘근본적 귀인의 오류’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유아를 성추행하고, 여성을 납치해 잔인하게 살해하고, 오랫동안 숱한 여성을 괴롭힌 범죄자들을 놀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본래 미친 놈들이었겠지’라고 간단하게 원인을 결론짓기도 한다. 이것도 근본적 귀인의 오류이다. 범인은 동네에 소문난 미치광이가 아니라 늘 우리 주변에 머물던 이웃이고 친구이고 내 가족이다. 그걸 인정하고 대책과 과제를 생각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래서 정부와 사회는 미친 놈, 불량배, 위험분자들을 필요로 한다. 경찰은 묻어둔 불심검문권을 되돌려 달라고 하고, 정치인은 문제의 성욕을 법으로 제거해 버리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다.

다수의 국민도 고개를 끄덕인다. 다 잡아들이면 간단히 해결될 것처럼 기대한다. 여기쯤에서 ‘제3자 효과’라는 것도 작동한다. 이것은 자기를 빼고 따지는 것을 가리킨다. ‘운전 중에 휴대폰 사용은 위험하니 휴대폰을 꺼둡시다’하면 옳은 지적이라고 수긍한다. 그러나 운전에 익숙한 자신은 해낼 수 있다고 여기며 휴대폰을 집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불심검문에 고생할 리 없고, 내 자식이 어디 가 성범죄를 저지를 리 없고, 사회의 쓸모없는 그 어떤 존재들은 영원히 성적 욕망이 필요 없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감정추단의 오류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나 현상을 나한테 좋은 것, 나쁜 것 아니면 우리 편에 유리한 것, 불리한 것…. 이 두 가지로 빨리 간단히 결정하려 한다. 정말 그런가를 증명해야 하지만 생략하고 싶어 한다. 반박하고 반증해야 하지만 접어버리거나 자꾸 뒤로 미뤄 놓는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에 반응해 성급히 판단하고 처음의 판단에 사로잡히는 것이 ‘감정추단의 오류’이다. 안철수 원장 측의 사퇴종용 폭로 회견 이후에 사회의 관심이 협박과 ‘목동 아줌마’로 갈라지는 것도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이런 예를 든 까닭은 우리 저널리즘의 직무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결합효과의 오류, 근본적 귀인의 오류, 제3자 효과, 감정추단 등의 함정이 존재함을 알리고, 그 앞에 ‘빠지지 마시오’라는 경고표지판을 세우고 길을 안내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책무이다. 불심검문을 왜 그리 쉽게 꺼내드는지, 불심검문의 사회적 부작용은 무엇인지, 한 발 더 나아가 불심검문에 수긍하는 태도와 거부감의 근원은 무엇인지…. 정치적, 사회구조적, 사회심리적 오류까지 짚어내 제시하고 판단은 독자와 시청자에게 맡기면 된다.

신자유주의가 범람하고 새로운 기술문명이 과거 언론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는 이 시대에 전통적 저널리즘이 지향하고 주목할 것은 인간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그 너머 인간의 실존이다. 사회적 대책 그 너머 우리 사회의 실존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길을 제시하는 저널리즘이 필요하다. 사실과 정보는 보도자료에 가득하다. 그러나 가치와 실존에 대한 고민은 보도자료에 없다. 기자의 세계관, 기자의 철학이 그것을 메워야 한다.

기사 작성을 마쳤다면 거기가 출발점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한 치 더 깊이 나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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