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참여 대신 투표만 하라는 언론

[언론다시보기]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주식회사 민주주의’라는 말은 경제학자인 제임스 갈브레이스가 미국 정치를 비판한 것이다. 유권자는 주식회사의 소주주처럼 주주명단에는 올라 있고 주주총회 때면 투표하라는 통지표가 배송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든 주주는 결국 들러리라며 외면해 버린다. ‘소액주주인 내가 주주총회에 나가서 뭘 어쩔 건가’, ‘내가 투표장에 가서 찍는다고 세상이 얼마나 달라진다고…’ 이렇게 스스로를 주저앉힌다. 그래서 언론은 유권자인 국민을 일깨우려 한다. 꼭 투표장에 가 소중하고 의미 있는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캠페인을 펼친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국민의 정치 참여의 핵심은 투표 참여가 아니라 정치 참여 그 자체이다. 그러나 언론은 정치에 나서라 하지 않고 투표에나 나서라고 한다. 왜 국민에게 정치를 권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따져야 한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절차가 권력일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정치가 아니라 지배이다. 진정한 민주정치는 국민이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고루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권력의 지배와 그 과정의 다툼, 이합집산을 ‘지배’라 표현하지 않고 ‘정치’라는 고상한 말로 얼버무리고 국민이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로 인해 민주공화국 시민의 정치적 권력은 박탈당한 채 잊혀진 유물로 남아 있다.

어떤 것이 시민의 정치인가에 대해 하나의 예를 들자.
1980년 일본 가나가와현 비와호에서 생활 배수가 원인이 돼 적조가 발생했다. 생활협동조합의 주부들을 중심으로 합성세제 추방 운동이 시작돼 22만명의 서명을 받아 가나가와현 내의 7개 도시에 합성세제를 추방하는 조례 제정이 청구됐다. 그러나 모두 부결됐다.

분노한 주부들은 조례제정 청원운동을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1984년 가나가와 네트워크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먼저 조직 내에 정치학교를 만들었다. 가나가와 네트워크는 리더십 있는 인물들을 선정해 정치학교에 입문시킨 뒤 집중 훈련시켰다. 가나가와현의 현안, 각 지역별 실태조사와 연구, 공약개발도 병행했다. 매주, 매월 지역 모임과 전체 모임을 잇달아 열어 모든 회원이 가나가와현 전체를 조망하고 현황을 파악하게 했다. 이것들은 고스란히 정치학교에서 수업 중인 대표 선수들에게 전수되었다. 정치강좌와 훈련과정을 통해 지역 주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선거공약은 무엇이고 어떻게 유권자를 공략할 지 지식과 전략을 제공한 다음 선거조직과 선거비용을 제공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아래와 같다.
1987년 통일 지방선거-15명 입후보, 9명 당선/1991년 통일 지방선거-32명 입후보, 18명 당선/1995년 통일 지방선거-44명 입후보, 35명 당선/1999년 통일 지방선거-62명 입후보, 39명 당선/2003년 통일 지방선거-66명 입후보, 39명 당선.

현실적으로는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정당이지만 법적으로는 정치적 시민단체이다. 가나가와 네트워크 출신 의원들은 자신이 받은 세비를 가나가와 네트워크에 기부한 뒤 다시 일부를 활동비로 지급받는다. 네트워크 출신 의원들은 시민권력과 정치권력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잡아 지역발전을 꾀하고 다시 후진을 양성하는 책임도 맡고 있다.

이 정치운동의 핵심은 의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시민 속으로, 시민을 정치 속으로 융합시키는 것이다. 정치에서만큼은 국가권력이나 정당에 의존적이었던 시민을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시민정치인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국민은 자신들이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자책한다. 그러나 정확히는 국민은 자신들의 정치를 박탈당해 온 것이다. 기득권에 둘러싸여 비싼 입장료를 요구하는 기성 정치권력과 투표장에 가는 것이 국민에게 부여된 정치의 전부라고 오도한 우리 언론에 의해서 말이다. 이제 언론은 시민의 편에 서야 한다. 그 첫걸음은 언론이 시민의 정치권력과 권리를 어떻게 박탈해왔는가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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