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 그리고 우리 기자 맞아?

[언론다시보기]이희정 한국일보 선임기자


   
 
  ▲ 이희정 한국일보 선임기자  
 
“너 기자 맞아?” “이걸 기사라고 썼냐?”
20여 년 전 햇병아리 기자 시절 무시로 들었던 말이다. 때로는, 아니 꽤나 자주 욕설도 딸려 나왔다. 내가 봐도 요령부득인 기사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고, 내 딴에는 공들여 쓴 원고가 붉은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순간 영혼에 쨍~ 하고 금이 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어느 책 제목을 빌리자면 ‘천 번을 들어야 기자가 된다’고 믿던 저 물음들을 요즘 새삼스레 자꾸 떠올리게 된다. ‘너’의 자리에 ‘나’를 밀어 넣고, 또 ‘우리’를 대입해 보면서.

기자란 어떠해야 하며, 무엇이 기사인가. 이 물음들을 놓고 지난 20여 년을 돌아보면 그 사이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예컨대 과거엔 범죄 피의자는 물론 용의자만 돼도, 심지어 피해자조차도 한자이름과 집주소의 번지수까지 모두 밝혀 적곤 했다. 정보를 캐기 위해 경찰을 사칭하는 것이 취재기법의 하나로 전수되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경을 칠 일들이다. 그 시절엔 당연히 사회면 톱에 올랐을 살인 사건도 요즘은 유명인이 연루됐거나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버려진다. 비판의 성역이 대부분 사라졌고, 언론계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런 일들은 애써 덮고 지나가던 ‘침묵의 카르텔’도 깨진 지 오래다.

윤리의식,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다양한 매체들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들이 많지만, 기자들 처지만 따지면 속된 말로 ‘기자 해먹기 힘든 세상’이 됐다. 데스크들에게나 듣던 “너 기자 맞아?” “이걸 기사라고 썼냐?”란 힐난을 이제는 취재원과 독자들에게서 다반사로 듣게 됐다. 오랜 기간 기자사회가 공유해 온 암묵적 동류의식이 언론사간 무한경쟁에 맥없이 밀려나고 어쭙잖은 이념적 대립까지 끼어들면서 이제는 소속과 진영이 다른 기자들끼리도 저 물음들을 무람없이 던지게 됐다.

싫든 좋든, 옳든 그르든 그렇게 달라진 세상에서 기자 노릇 제대로 하며 살아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도 똑 부러진 해답을 내놓기 어렵겠지만, 분명한 것은 기자들 스스로 더 많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저 물음들을 “나 기자 맞아?” “이걸 기사라고 썼던가?” 하는 자문(自問)으로 바꿔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능력이 모자라, 마감 시간에 쫓겨 함량미달의 기사를 내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관행에 기대, 데스크의 지시 혹은 진영의 논리를 좇아 겉보기만 그럴싸한 기사들을 쏟아내는 일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다툼과 잡음이 사라져가는 편집국(보도국)의 풍경이다. 언론사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브리드가 지적한 ‘삼투작용 식 순응’이 지배적 문화가 돼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생존이 제1의 목표가 된 마당에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다며 혀를 찰 지도 모르겠다. 선배가 되고 한동안 책상을 차고 앉아 보니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입맛에 딱 맞는 기사를 들고 오는 후배가 당장은 예뻤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툼과 잡음 없이 매양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을 언론사라 할 수 있을까. 제 머리를 스스로 굴리지 않는 기자, 나쁜 관행이나 부당한 지시에 맞서지 않는 기자를 기자라 할 수 있을까.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서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저널리즘의 기본원칙들을 제시하면서 이 원칙들을 달성하는 데 무엇보다 ‘열린 뉴스룸’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사람들이 서로의 주장, 인식, 편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열린 분위기가 없으면, 모든 노력은 비좁은 방안에서 질식하게 된다.” 사주나 경영진, 편집국 간부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지만, 기자들이 침묵하고 순응하는 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한다. “나, 너, 그리고 우리 기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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