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성 추문을 다루는 방식

[언론다시보기]이희정 한국일보 선임기자


   
 
  ▲ 이희정 한국일보 선임기자  
 
요즘 뉴스 보기가 낯 뜨겁고 불편하다. 끊이지 않는 성(性) 추문들 탓이다. 성 관련 사건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요즘처럼 봇물이라도 터진 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경우는 흔치 않다. 연예인,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인권활동가까지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양하고, 성폭행부터 성 접대, 누드사진 검색, 성희롱 논란까지 내용도 퍽 다채롭다. 연일 이 사건들의 경과와 경찰 조사 현황, 연루자들의 진실 공방 등을 시시콜콜 전하는 보도를 보다 보면 마치 온 나라가 성을 간판으로 내건 초특급 리얼리티 쇼라도 찍고 있는 듯하다.

없는 추문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하나같이 파장이 큰 사건들이니 관련 기사를 앞다퉈 크게 혹은 많이 냈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성 접대 의혹 사건의 경우 잇따른 인선 실패로 출범 한 달이 지나도록 조각조차 끝내지 못한 박근혜 정부의 먹통 인사검증 시스템과 직결된 사안이니 더 끈질기게 더 깊이 추적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언론이 이들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다. 범죄 의혹 사건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성 관련 사건은 보도되는 순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 심지어 피해자까지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을 수 있다. 또한 사안의 본질보다는 흥미를 끄는 지엽적인 뒷얘기들에 관심이 과도하게 쏠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이번 사건들의 관련 보도를 보면 많은 경우 이런 취재ㆍ보도윤리의 기본 원칙이 간단히 무시됐다.

배우 박시후씨가 연예인 지망생 A씨로부터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의 경우 초반부터 박씨의 실명이 등장했고, 양측의 진실 공방을 생중계하듯 전하는 과정에서 A씨가 지인과 주고 받은 카카오톡 대화를 그대로 실었다. 성 접대 의혹 사건에서도 호화별장에서 벌인 ‘성 파티’ 현장이 담겼다는 동영상의 내용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이 범람했다. 종합편성채널 JTBC는 동영상에 담긴 낯 뜨거운 광경을 재연한 장면을 버젓이 내보내면서 “성관계를 하는 듯한 모습이지만 실제 성행위를 한 것인지, 장난처럼 시늉만 하는 것인지 판단이 쉽지 않다”는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였다. SBS 뉴스에서는 속옷 차림의 중년 남성이 여성을 껴안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삽화가 전파를 탔다.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얼기설기 엮은 기사들이 ‘단독’이란 문패를 달고 쏟아지기도 했다.

큰 사건에서 취재 경쟁이 과열되다 보면 기자들은 ‘뭐라도 일단 쓰고 보자’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파장은 갈수록 커지는데 이것저것 따지다 ‘물배’만 차는 건 아닐까, 눈덩이에 깔려 널브러지지 않으려면 앞장 서 눈덩이를 굴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옥석을 가리고 중심을 잡아줘야 할 데스크들마저 눈치로 회초리를 때려대니 기자들은 소소한 낙종을 일거에 만회할 ‘더 센 것’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그간 편집국(보도국)에서 벌어진 광경이 꼭 이러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태가 이쯤 되면 ‘도를 넘은 폭로’ ‘인격 살해’를 질타하는 기사가 정해진 수순처럼 등장한다. 그런데 비판의 화살은 대부분 ‘관음증에 빠진 사회’ ‘소문을 부풀리는 인터넷과 SNS 문화’를 향해 있다. 더러 언론의 과열 보도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남의 집 얘기하듯 자성(自省)은 쏙 빠져 있다. 박씨를 고소한 A씨에 대한 ‘마녀사냥식 신상털기’를 비판하는 기사에서조차 생생한 예를 든다며 인터넷에 떠도는 A씨의 과거 행적과 관련한 음해성 글들을 여과 없이 전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어디 이번뿐인가. ‘신정아 사건’때도, ‘상하이 스캔들’ 때도 그랬다. 언론들이 앞장 서 닥치는 대로 쓰고 보란 듯이 벗겨놓고는 슬쩍 돌아앉아 야단까지 쳤다. ‘감시와 비판’을 업으로 삼은 언론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정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얘기다. 제 얼굴에 침 뱉는 얘기, 공염불에 그치고 말 얘기를 또 하고 있자니 민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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