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들 쓰십시다'
[언론다시보기] 정재민 카이스트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교수
정재민 카이스트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교수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6.26 15: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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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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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시절 가장 즐거운 여가는 동네 서점에서 서가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거였다. 그 때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자서전’을 모아둔 섹션이었다. 본인이 직접 쓴 전기와 누군가가 기록과 인터뷰에 의존해 쓴 전기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자서전은 가장 넓은 서가를 차지하고 있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책을 펼쳐보며 머무는 공간이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정치, 외교,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 사람들의 자서전이 펼쳐져 있었고, 실제로 많은 전기들이 팔리고 있었다. 필자가 만난 외국 친구 중에는 자서전만 골라서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기자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남긴 책들도 있다. 자서전으로 기록되지는 않지만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을 떠올려본다.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기록을 낱낱이 적은 책이다. 기자라면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974년에 쓰여진 이 책은 미국대학에서 저널리즘 과목의 교재로 쓰이고 있고, 언론인들도 진실보도를 위한 최고의 노력으로 손꼽고 있다.
2년 후 두 사람은 닉슨 대통령 재임기간의 마지막 몇 개월을 기록한 ‘파이널 데이(The Final Day)’를 책으로 펴냈다.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클린턴, 부시, 오바마 정권까지 행정부의 실상을 파헤치는 기록들을 책으로 남기고 있다. 취재기록과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국 이 또한 기자로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나간 자서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서전들 쓰십시다’는 이청준의 연작소설집의 제목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타인의 자서전을 써주는 대필작가다. 코미디언 피문오씨는 자신이 사람들을 웃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지하고 진실된 사람으로 보이게 써주기를 바란다.
주인공은 추한 과거는 숨기고,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써넣어야 하는 현실에 붓을 던진다. 대신 가치있다고 생각한 산골 사람 최상윤씨의 자서전을 구상한다. 최상윤씨는 거짓없이 써주길 바라지만 그의 투철한 신념이 자신을 만들어왔음을 강조해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두 사람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한 자서전을 택하고 있다.
밥벌이를 위해 다시 대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라는 말은 동네 어귀를 도는 찹쌀떡 장수의 “찹쌀떡 사려~”처럼 들려온다. 말하고 쓰는 것이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아 마치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청준은 자서전을 쓰라고 권유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통해 진실된 언어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이야기한 것이다.
자서전은 자신을 우상화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글이 되어서는 안된다. 과거의 상처와 역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자기 성찰과 용기로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기록을 통해 역사와 지혜를 배울 수 있고, 진실을 알 수 있다면 그보다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역사의 현장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기자들이야말로 그런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국정원 선거개입, 통계수치 조작, 전대미문의 한국일보 편집국 폐쇄 등 답답해서 속터질 일들이 왜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 즉각적으로 짧은 글들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기록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긴 호흡으로 사건 이면의 진실들을 추적하고 기록해 나간다면 ‘좋은 자서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조심스럽게 기자들에게 영혼을 담아 진실을 기록하는 “자서전들 쓰십시다”고 제안해본다. 40년 전 미국의 기자들이 쓴 한 권의 책이 그랬던 것처럼, 기자들의 ‘좋은 자서전’이 우리 사회, 우리 언론을 성찰하고 발전시키는 올바른 이정표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