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에게서 노무현을 본다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7.17 15:22:18
|
|
|
|
|
▲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 |
|
|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연일 화제다.
박 대통령은 지난 11일 제2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는 재밌는 말을 했다. 하루 전 언론사 간부 간담회에서는 “(경제민주화) 중점법안이 7개 정도였는데 6개가 이번(6월 국회)에 통과됐으니,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그동안 경제민주화에 대해 ‘대기업 옥죄기’라며 앙앙불락했던 재벌은 즉각 반색하고 나섰다. 경제민주화 입법이 사실상 종결됐으니 이제는 성장을 위한 투자에 집중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메시지가 정말 재계의 해석대로라면 일은 크게 잘못돼가고 있는 것이다.
우선 경제민주화 입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4월과 6월 국회에서는 재벌 총수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신설, 우리사회의 대표적 ‘을(乙)’인 가맹점주의 권리 강화, 부당 납품단가 인하 등에 대한 3배(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 적용 등의 경제민주화 입법을 처리하는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재벌의 지배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신규 순환출자 금지, 제2금융권에 대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 확대, 배임·횡령 등의 중대한 경제범죄에 대한 법집행 강화 등과 같은 핵심 법안들은 아직 서랍 속에 있다. 후하게 평가해도 ‘절반의 성공’ 이상은 아니다.
또 경제민주화는 법이 만들어졌다고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최근 “법 개정의 성과를 제대로 거두려면 시행령 등 하위법령을 제대로 만들고, 무엇보다 법을 시행할 인력과 조직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위해 지난 2005년에 폐지된 조사국과 유사한 재벌 정책·조사 전담조직 신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하면 설령 투자를 해도 국민 모두에게 성장이 골고루 미치지 않고,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양극화만 더욱 심해지고, 좋은 일자리와 중소기업 강국, 창조경제, 지속가능한 성장과 같은 우리의 목표는 모두 헛된 꿈이 될 것이다.
재벌들은 지난해 SK, 한화, 태광그룹 총수의 구속과 실형선고에 이어 CJ그룹 이재현 회장까지 구속되면서 기업을 마치 사유물처럼 취급하며 배임·횡령·탈세 등 온갖 탈법을 저지르고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설령 사법당국에 적발돼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당연시하던 총수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민주화가 중도에 흐지부지된다면 이마저도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앞서도 논란이 됐다. 지난 5월말 국민경제자문회를 주재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창조경제를 위해서도 경제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왼손으로는 “투자심리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고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의 이런 ‘이중 플레이’는 새누리당에게 ‘속도 조절론’‘경제살리기 우선론’을 내세워 경제민주화 법안의 발목을 잡는 빌미를 제공했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 출범 초기 “권력은 시장(재벌)에 넘어갔다”면서 개혁에 저항하는 재벌에게 ‘백기’를 들었다. 결국 참여정부는 경제정책에서 보수 및 개혁진보 진영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이는 집권후반기 ‘식물정권’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됐다.
보수언론들은 최근 박근혜 정부의 경제팀을 향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현 경제팀이 경제회복에 부정적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며 경제민주화 정책을 공격했다. 대포는 경제팀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은 “뽑아주니까 뭐하고 있느냐”는 대통령을 향한 경고가 담겨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면 지금껏 쏟아온 ‘땀과 노력’까지 모두 헛수고가 되고, 급기야 노무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