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하지 말아야 할 일
[스페셜리스트 | 법조]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사회부 법조팀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7.31 15: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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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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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백억원대의 계열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53) 등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재판장인 문용선 부장판사(55·사법연수원 15기)가 최 회장의 최후진술 직후 몇가지를 질문했다.
“최태원 피고인. 지난 공판기일에 법정에서 재판장이 ‘일반적으로 유죄판결을 하면서 형을 정할 때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경우 그렇지 않을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하는 게 양형원칙에 부합하는데, 이 재판장은 특히 양형에 있어서 피고인이 진지하게 반성하고 용서구하는 것에 대해 유리한 양형사정으로 참작한다’는 말을 들었죠?” 최태원 회장은 “네”라고 답했다.
질문이 이어졌다. “피고인은 이 사건 14차 재판이던가요, 15차 재판이던가요. 그때부터 변호인을 추가로 선임한 뒤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혹시 형량을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닌가요?” 최 회장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문제는 다음 질문에 있었다. “(최 회장이 진술을 바꾸기 전) 그 무렵에 재판장이 변호인과 기일 및 절차협의를 위해 전화를 하면서 ‘피고인이 혹시라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 동기가 오로지 재판장의 진정한 뜻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지 피고인이 가벼운 처벌을 원하려는 것이면 안 된다. 그러려면 자백을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변호인으로부터 전해들었나요?” “그런 취지 비슷한 것은 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문답을 받아쓰면서 필자는 언뜻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장 스스로 변호인과 피고인의 형량에 대한 상의를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법정 밖에서 전화통화를 통해서 말이다.
실제 최 회장은 지난 16일 이공현 지평지성 대표변호사(64·사법연수원 3기)를 추가선임한 이후 “450여억원의 펀드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헌법재판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이공현 변호사는 김황식 전 총리(65·사법연수원 4기)와 대법관 자리를 놓고 경쟁할 정도로 법조계에서 실력면이나 인품면에서 ‘존경받는 판사’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 부장판사 역시 이 변호사를 존경하는 선배로 꼽는다고 전해진다.
결국 재판장이 평소 존경하던 선배 법관이 피고인의 변호인으로 추가선임되자 자신의 전략을 선배 법관에게 노출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최 회장은 이 변호사가 선임되기 전까지도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 변호사가 선임된 이후 그는 종교에 다시 귀의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반성하고 자백하기 시작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 수도 있지만 석연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날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로부터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민사재판에서야 조정을 위해 재판장이 변호인과 상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형사재판은 우리나라 사법절차가 미국식이 아닌 이상 재판장이 변호인과 사적으로 형량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것은 법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정치적 사안이나 재벌총수와 관련된 재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법관은 ‘보여지는 것’에도 항상 주의를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