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촛불을 두려워하는가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요즘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시위가 한창이다. 그런데 언론보도는 시위의 원인이나 해법보다 다른 쪽에 관심을 보이는 양상이다.

먼저 시위의 ‘산수’화 보도다. 집회 참석자 주최측 추산과 경찰 추산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는 게 화젯거리가 된다. 경찰이 집계 방식을 검토해보겠다는 말을 할 정도다. 대통령 지지율과 집회에 모인 사람 수를 비교 분석하는 ‘신선한’ 접근법도 등장한다. 정확한 수치를 따지는 것은 사건기자 때부터 배운 ABC이니 기본에 충실한 것을 나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게 본질인지는 수긍하기 힘들다.

또 시위의 ‘색깔’화 보도다. 운집한 시민들에게 정치적 색채를 덧씌우는 방식이다. 특히 가장 많이 달리는 꼬리표가 ‘대선 불복’이다. 뭔가 음험한 저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식이다. 시위대 중에는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사람들도 물론 있기는 하다. 여기서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구호 한 켠에는 ‘민중헌법 제정’ ‘민중권력 쟁취’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6·10을 ‘민중혁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시위의 ‘양극화’ 보도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촛불시위 관련보도에는 우익단체의 맞불시위가 샴쌍둥이처럼 등장한다. 127석을 가진 야당이 가세하고 가장 보수적이라는 대구경북지역의 천주교 사제들까지 시국선언으로 동참하는 촛불시위와 동등하게 언급될 만한 것인지 의문이다. 기계적 균형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하다. 차라리 편향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이것은 나은 편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아예 보도를 외면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시위의 ‘무존재화’ 보도다. 촛불시위가 사라진 지상파 보도 큐시트를 폭염과 해파리, 식인상어, 멧돼지가 대신 채운다. 기상전문채널인지, ‘동물의 왕국’인지 모르겠다는 비아냥은 그래서 나온다.

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 기자들은 대학생들의 시위 기사 한줄 쓰기도 어려웠다. ‘하늘에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에는 유람선이 떠있고’, 올림픽이 열리고 수출액은 매년 경신되는 태평성대가 언론이 그려야 했던 대한민국이었다. 당시는 군화발의 무게 때문에 그랬다면 지금은 언론사 수뇌부들의 정파적 신념 때문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한 정파는 시위라는 문화 자체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듯하다. 뭔가 불순한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지배층의 불안감이다. 이를 뿌리부터 무력화시켜야 사회가 안정되고 잘 돌아갈 것이라는 본능이다.

하지만 대선불복 프레임은 오히려 진짜 대선을 불복할만한 사실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확산시킨다. 올드미디어들이 아무리 촛불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해도 SNS와 뉴미디어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왜 애써 감추려고 하는가’는 물음표가 늘어날 뿐이다. 그게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나라 시민의 상식이다.

사상 최악의 폭염에 촛불까지 기온을 높이는 현실이 우려스럽다면 언론이 ‘자유민주주의’의 정도를 걸어야 한다. 경찰과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만약 이런 일이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이글거리는 촛불에 비쳐진 우리 저널리스트들 스스로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대답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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