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에 인색한 언론

[언론다시보기] 김준현 변호사·민변 언론위원장


   
 
  ▲ 김준현 변호사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을 둘러싼 언론 보도를 보면 불편하다. 갈등상황만 전면에 내세우면서 국책사업에 반대하는 여러 님비현상 중 하나로만 분석하는 듯해서다. 어떤 언론은 외부세력의 부추김이 원인이라는 식으로 색깔론조차 내세우고 있다.

개발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언론의 이런 보도 행태는 몸에 밴 오래된 습관같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국책사업은 개발과 성장을 상징했다. 과거 1970년대식 성장일변도 경제개발이 가져온 환상이다. 이런 인식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성장은 곧 ‘선(善)’이라는 도그마로 언론을 인도한다. 국책사업이 항상 선이 아님은 푸른 강물을 녹차라떼로 만들어 버린 4대강 사업에서 확인되었음에도 말이다.

가깝게 ‘용산참사’를 떠올려 보자. 도시정비사업에 의한 철거는 개발이고 성장이라는 논리가 득세했다. 철거대상자인 주민들의 반대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고 치부당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그 당시 그들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독자, 시청자들도 언론이 주는 프레임에 갇혀 세상을 본다. 언론은 여론형성 기능을 통해 그렇게 세상을 장악한다. 그 메시지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성장과 개발을 위해 서울시의 도시정비사업은 불가피하다. 국제업무지구가 들어서면 주변지역 땅값도 오르고 지역주민의 경제적 이익도 상당하다. 철거민들에겐 안타깝지만 충분한 보상비를 주면되지 않느냐. 추운 겨울에 공권력이 안전조치도 없이 발동된 것은 문제지만 어쩔 수 없다”식의 논조다.

밀양 송전탑 공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올해 여름에도 행정당국은 전력난 우려를 강조했다. 실내 냉방온도도 규제했다. 블랙아웃을 운운하며 비상사태시 아파트부터 단전조치하겠다고 경고도 던졌다. 이와 어울리면서 전력수급 해결을 위한 송전탑건설을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언론을 지배한다.

이런 논리가 궁극적으로 깔고있는 대안은 ‘보상’인 듯하다.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보는 식이다. 행정당국이나 한전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 입장은 법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국가는 공익사업을 위해 토지를 수용할 수 있고, 한전은 발전시설을 건설할 수 있도록 법 제도화되어 있다.

이 같은 제도와 법 속에서 송전탑 공사강행을 보는 언론의 시각 역시 주어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용산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법과 제도가 인정하는 국책사업은 진행되어야 하고, 해당자는 보상비를 받고 용인해야 한다. 이에 반대하는 것은 보상비를 올리려는 주민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외부세력의 합작에 불과하다”는 식의 일방적인 보도만 쏟아낸다.

여기에는 생활터전을 뺏기는 아픔에 대한 아무런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밀양 주민 일부는 고향산천을 보전하기 위해서나 전자파의 위해성 때문에, 또는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력 사고 이후 더욱 부각된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이나 다른 이유에서 송전탑 건설에 반대할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전달되고 있는가. 더욱이 지난 16일 송전탑 공사강행의 주요 근거였던 신고리 핵발전소 3, 4호기 가동이 원전 비리사건으로 지연된다는 소식도 나왔다. 그런데도 한전은 공사강행 의지를 밝히고 여전히 공사에 착수하고 있다. 이를 비판하는 언론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자력에 대한 경각심을 보도하면서 송전탑 문제에 대한 심층보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무엇보다도 언론이 지배적 경제논리에 매몰된 나머지 인권 감수성마저 말라버린 결과다. 인권 감수성은 다른 게 아니다. 주변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전달이 언론의 1차적 기능이라지만 어떠한 사실을 알릴 것인가는 해당 사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보도내용을 보건대 문제의식이 없다. 개발과 성장, 이에 반대하는 지역주민이라는 이분법만 남아 있다.

공감(共感) 능력의 부족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감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다. 주민입장에 서 봐야 한다. 밀양 주민의 말대로 “왜 구덩이를 파는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을 하려면 자신이 가진 논리의 틀을 깨야 한다. 즉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사회에서 법과 제도를 따르는 것이 항상 정의는 아닐 수 있다. 경제논리 또는 제도와 법만으로 세상의 다양한 갈등을 풀 수 없음은 당연하다. 보상금을 올려준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하지만 다수결은 항상 소수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그래서 공감에서부터 나온다.

우리 언론은 소수자에 인색하다. 사실 전달과 여론 형성이라는 기능을 통해 언론이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지배적 논리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선을 가져야 한다. “언론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며, 이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신문윤리실천요강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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