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뷰징, 후배들에게 부끄럽다
[언론다시보기]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4.03.10 18: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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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상욱 CBS 콘텐츠본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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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기자협회보를 통해 ‘검색어 장사’와 ‘어뷰징’ 기사의 실태, 그리고 그 작업에 내몰린 후배 기자들의 토로를 접했다. 언론사 온라인 사이트의 트래픽을 늘리기 위해 ‘인기 검색어’를 몇 번 이상 집어넣는 마케팅공식에 따라 억지맞춤형 기사를 쓰고, ‘바이라인’에는 작성 기자의 이름 아닌 언론사나 팀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기자(記者)의 기사(記事)가 제품명과 제조일자, 제조회사명을 넣어 기계로 찍어낸 공장생산품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언론사 한 간부의 코멘트도 놀랍다. “검색어 기사 생산은 단순반복적인 업무인데 기자들한테 맡기면 누가 하겠느냐”. 그래서 이 일을 떠맡는 사람은 결국 인턴 기자이고 그나마 그 비용이 아까운 언론사는 정규 기자한테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나는 트래픽 올리는 기계에 불과했다”는 인턴기자들의 자조적인 이야기 대목에서는 얼굴이 달아오르며 입이 마른다. 기자 쓰레기라는 말을 줄여 ‘기레기’라 부른다는 말도 지난 주 기자협회보에서 처음 접했다.
그날은 마침 언론이 어뷰징 기사를 쏟아낸 날이기도 하다. 커플맺기 방송 프로그램 ‘짝’에 출연한 여성이 자살한 사건으로 엄청난 양의 기사들이 온라인을 가득 메웠다. 사망자의 공책에 담긴 별 의미 없고 단서가 될 것도 없는 글들을 잘게 쪼개 기사 건수만 늘린 것들이 많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쪼개 120건을 올린 언론사도 있다고 한다.
거의 같은 내용임에도 “시청자 게시판…민폐 쩐다, 집에 가서 죽던가”, “시청자…민폐 쩐다”, “시청자들…집에 가서 죽던가 막말 일색”, “민폐 쩐다, 시청자들 막말 퍼부어”로 제목이 바뀌며 잇달아 기사를 내보냈다니 놀라운 경지이다.
공교롭게도 이 기사들이 올라오는 시점에 필자도 ‘짝’ 출연자 자살에 관한 기사를 요청 받았다. 방송기사로 다 소화해내지는 못했지만 상식선에서 머리를 짜내며 적어 간 사전 메모의 내용은 이러하다.
1. ‘짝’이란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의 집단적 관음증을 자극했고 우리가 즐겨봤다는 점에서 가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2. 남녀가 만나 정이 들고 짝이 되어 결혼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만한 상대를 짝으로 쟁취하고 나서 연애를 시작하는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식 해체일까?
3. 녹화의 몰입을 위해 출연자를 격리수용하는 방식은 현실감각의 둔화로 심리적 압박을 극대화해 가해장치로 작동한 것은 아닐까?
4. 출연자들의 경쟁과 제작진의 의도된 연출,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밀착 카메라 등이 부작용을 일으킬 경우 녹화장에 심리적 응급치료를 담당할 기제는 마련된 것일까?
5. 사망자의 자살동기는 ‘분함과 수치스러움’ 아니면 ‘고달픔과 우울함’…두 가지 중 어느 쪽일까? 시대의 변천으로 오늘날 자살의 동기는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6. 왜 남성이 아닌 여성 출연자의 자살일까? 우울에 의한 자살, 실연에 의한 자살, 이것들과 젠더의 문제는 상관관계가 얼마나 있는 걸까?
7. 자살에 대한 사회의 무반응, 무관심도 큰 문제. 여럿이 연쇄로 자살하거나 ‘짝’ 출연자의 경우처럼 특이한 사례에나 반응하고 정권규탄 분신자살에조차 무덤덤한 오늘의 세태는 어디서 오는 걸까? 공동체적인 가치와 시대정신의 소멸이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에 대한 존중, 생명에의 연민을 약화시킨 탓일까?
8. 그럼에도 한 사람의 자살을 두고 어떤 식으로든 많은 기사와 댓글이 쏟아지며 사회가 논란에 빠져드는 것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건강함의 척도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일까?
언론에 실망한 후배들에게 미안함을 전제로 당부하고 싶다. 저널리즘의 보도는 ‘취재의 구상’과 ‘기사의 기승전결’에 ‘저널리스트의 신념과 결의’가 통합적으로 연관되면서 깊이와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러 문제의식과 여러 개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저널리즘은 기사의 취재와 작성, 그 이상의 것이다. 저널리즘은 ‘세상을 보는 방식’ 즉 세계관이고 저널리스트의 ‘삶의 방식’이어야 마땅하다. ‘주관’과 ‘편견’이 아니라 ‘존재’로서 자기 자신이 그 기사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오늘 이후로도 여러분에게는 그렇고 그런 기사가 강요되겠지만 저널리스트로 남겠다면 이 점을 기억해 주길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