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큐레이션 저널리즘'

[언론 다시보기] 예병일 플루토미디어대표


   
 
  ▲ 예병일 플루토미디어대표  
 
‘큐레이터’가 미디어 분야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큐레이션 저널리즘’은 미디어와 언론인의 모습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큐레이터는 원래 큐레이션을 하는 사람, 즉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의 전시 책임자를 의미하는 단어다. 작품들을 임대하거나 수집해 기획전을 연다. 얼마 전 필자는 ‘큐레이션의 승리’를 목격했다. 그동안 ‘흉물’이다, ‘예술작품’이다 해서 논란이 컸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개관 기획작으로 ‘간송문화전’을 내놓은 것에서다. 사람들은 전시되는 콘텐츠에 주목했다. 개관 시점에 불거질 것으로 보였던 공간 자체에 대한 논란은 일순 잠잠해졌다.

이 큐레이터라는 말이 이제 미술관에 한정되지 않고 ‘정보를 다루는 존재’라는 의미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 미디어 분야에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기준으로 콘텐츠들을 골라 ‘가치를 더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제시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개인이건, 미디어를 표방하는 그룹이건, 누구나 큐레이터가 될 수 있다.

수요도 충분하다. 정보와 뉴스, 콘텐츠가 흘러넘치는 시대이다 보니, 누군가 자신이 신뢰하는 이가 정보의 큐레이터가 되어서 ‘기획전’을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신문 지면이나 방송, 나아가 언론사 사이트가 아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블로그 등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들을 통해서 뉴스를 접하고 있다.

사실 기존 미디어 입장에서 큐레이션의 부상은 미묘한 의미를 갖는다. 껄끄럽고 당혹스럽기까지도 하다. 비용을 들여 힘들게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저작권을 외면하는 일부 큐레이터들은 ‘무임승차’를 노리는 얄미운 존재로 보인다.

미국에는 ‘허핑턴포스트’처럼 나름대로 저작권을 의식하며 큐레이팅을 하는 뉴미디어도 있지만 이를 시대에 뒤떨어진 법이라며 사실상 무시하려는 뉴미디어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큐레이션으로 페이스북에서 40만이 넘는 팬을 확보한 한 사이트에 대해 초기 웹하드 업체들과 비슷하게 원작자들의 저작권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인터넷상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10년째 ‘예병일의 경제노트’라는 글을 매일 인터넷에 쓰고 있는데,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필자가 올린 글이 아닌 ‘큐레이터’들이 퍼온 블로그나 카페의 글들이 검색된다. 대개 부분인용이 아니라 전체를 가져온 글이고, 일부는 출처 표기도 없는 경우가 있다. 수익을 위해 쓰는 글이 아닌지라 ‘펌’을 ‘독자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어색한 모습이긴 하다. 결국 큐레이션 저널리즘도 시장이 커져야 저작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가 되어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물론 ‘뉴 커머’들에게 큐레이션은 ‘성공의 기회’이다. 애플의 전설적인 마케터였던 가이 가와사키는 “이제 크리에이션이 아니라 큐레이션이 왕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링크의 세상, 소셜의 세상에서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원작자를 존중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가하는 큐레이션이라면 분명 맞는 말이다.

어쨌거나 현재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큐레이션의 시대로 가고 있고, 변화는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언론사나 기자가 큐레이터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큐레이션이 부상한 미디어 환경 변화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간 고수해온 ‘폐쇄성’은 벗어던져야 한다. 예컨대 다른 매체의 글을 인용했다면 ‘과감히’ 링크를 걸어주어 독자들이 손쉽게 다른 매체로 이동할 수 있게 ‘개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언론은 개방에 너무 인색했다. 독자를 ‘내 울타리’ 속에 가두는 폐쇄적인 전략으로는 소셜시대에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

큐레이션을 포함한 인터넷과 소셜 시대가 미디어의 모습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개인적인 의견을 다음 기회에 제시해보겠지만, 분명한 건 조직으로서의 미디어에게는 좀 더 힘든 시기가 올 것이고, 언론인 개인에게도 그보다는 덜하지만 만만치 않은 환경이 될 것이며, 일반인이나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를 만들려는 이들에게는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