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적법” 대법 판결에 절망…결국 갈 곳은 동료들 있는 공장 안
이효리·김의성씨 등 시민 위로에 더 이상 춥지도 외롭지도 않아
해고자 문제 대화로 풀고 싶어…회사도 전향적 태도 보여줬으면
2015년을 맞아 기자협회보는 외부의 시선으로 기자와 언론을 들여다보는 ‘밖에서 본 기자, 밖에서 본 언론’ 연중기획을 시작합니다. 언론에 하고 싶은 이야기, 언론에 못 다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어 좋은 저널리즘의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벼랑 끝 심정으로 70m 높이의 굴뚝에 오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편집자
9일 오후 1시50분께 경기도 평택시 쌍용차 평택공장 안 굴뚝 위로 거무스름한 물체가 올라가고 있었다. 굴뚝 난간에 기대 줄을 당기는 두 사람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가르는 줄에 매달린 것은 한 끼 밥이었다.
“식사하셔야죠?” 전화를 걸어 알은체를 했다. “어…. 오셨어요. 얼굴 한번 봅시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기자들은 양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했지만 70m 굴뚝에서 드넓은 공장에 있는 우릴 찾기란 쉽지 않았다. 굴뚝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도 시야를 가렸다.
굴뚝 농성을 지원하는 공장 인근 천막에서 영상통화를 했다. 흔들리는 화면 위로 초췌한 모습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나왔다. 그는 김정욱 사무국장과 함께 이날로 28일째 70m 굴뚝에 머물러 있었다.
-아픈 곳은 없나요?
“바람이 많이 불어서 타박상, 온 몸에 멍 같은 게 있어요….”
-굴뚝이 많이 흔들리나요?
“이 정도면 안 흔들리는 거에요.” 그는 휴대폰 영상으로 굴뚝 옆과 아래, 쌍용차 공장부지, 휴대폰 충전용 태양열판 등을 차례로 보여줬다.
김정욱·이창근은 지난달 13일 새벽 4시15분께 쌍용차 평택공장 안 70m 높이의 굴뚝에 올랐다. 해고자 문제 해결을 위한 벼랑 끝 심정이었다. 지난해 11월 쌍용차의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는 적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은 5년간 견딘 복직의 꿈을 앗아갔다.
대법원 판결 후 절망과 좌절의 한 달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공장으로 돌아가 신명나게 일하고 싶고, 목숨을 끊은 26명의 동료들에게 떳떳해야 했다. 두 사람은 새벽 칼바람을 온몸으로 헤치면서 얼어붙은 철제 사다리를 하나씩 짚어가며 굴뚝으로 올랐다.
“대법원 판결로 기댈 수 있는 게 없어졌습니다. 해고 노동자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건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들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정욱) “법 위에 밥이 있고, 제도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장 안 동료들입니다. 동료들에게 ‘손을 내밀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올라왔습니다. 쌍용차의 정상화는 여기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평택공장 방문에 앞서 지난 7·8일 ‘굴뚝인’ 김정욱·이창근씨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진행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전화선 너머 목소리로만 있었지만 불편함이 없었다. 소리 내어 웃고 말뜻을 이해하고 안 들리면 되물었고 차분하게 답했다. 굴뚝 위에서 칼바람과 혹한 추위를 견디며 고달프게 지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은 얼마나 거칠고 고단하고 황량할까. 또 두 사람은 얼마나 비장할까.
기자들은 지상에 있고 두 사람은 70m 높이 공중에 있어 아득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의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맑고 깊은 내면의 울림과 복직의 희망이 알알이 전해져오면서 안쓰러움과 미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전화 인터뷰는 각각 꼬박 1시간을 채우고 말았다.
두 사람이 살을 에는 추위에 굴뚝에 오르자 이효리씨는 트위터에 “해고되었던 분들이 다시 복직된다면 티볼리 앞에서 비키니 입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고 썼다. 영화배우 김의성씨, 웹툰작가 강도하씨도 1인 시위로 응원했다.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석학 가야트리 스피박과 미국의 대표적인 비판 지식인 노엄 촘스키도 두 사람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런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창근은 굴뚝을 비추는 햇살이라고 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에 손을 내밀어줘 너무 고맙다. 지금까지 까만 거실에 있었다고 하면 그분들의 응원은 커튼을 젖혀서 햇살이 들어오게끔 역할을 한다.” 김정욱은 고공농성 첫날에 날아든 문자메시지와 카톡에 눈물을 훔쳤다.
출퇴근길에, 점심시간에 굴뚝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 공장 안 동료들은 추위를 잊게 하는 따뜻한 핫팩이다.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손을 내밀어 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공장 안 동료들이 이심전심으로 화답하고 있다. 그래서 춥지도 외롭지도 서글프지도 않다. “굴뚝에 올라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 근무 동료가 ‘힘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해고자 문제가 잘 풀려서 같이 일하길 바라는 동료들의 따뜻한 마음이다”라고 김정욱은 말했다.
쌍용차 사태는 대규모 정리해고로 인한 노사갈등의 대표적 사례이다. 2008년 판매 부진과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업회생절차를 밟게 된 쌍용차는 이듬해 4월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는 2646명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노조는 평택공장 출입문을 봉쇄하고 77일간 ‘옥쇄 파업’을 벌였고 사측은 직장폐쇄로 맞섰다. 이명박 정부는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에 나섰다. 지금까지 최종적으로 1904명이 희망퇴직하고 187명이 정리해고됐다. 그 사이 절망에 빠진 해고자와 가족 2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복직 싸움은 질기고도 길었다. 한상균 전 쌍용차지부장 등 3명은 2012년 3월11일부터 이듬해 5월까지 모두 171일 간 쌍용차 평택공장 인근 30m 높이 15만4000V 송전철탑에서 고공농성을 벌였고, 해고 노동자들은 1년 7개월 동안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천막농성하며 해고자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이창근과 김정욱은 20~40대의 청춘을 쌍용차에 바쳤다. 이창근은 28살이던 2001년 쌍용차에 입사해 코란도 검사 일을 하다가 2007년부터 조립4팀과 조립3팀에서 라인을 탔다. 김정욱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팔팔한’ 23살에 쌍용차에 들어와 조립라인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3년부터 생산라인에 투입됐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평범한 노동자의 삶은 2009년 6월8일 정리해고라는 날벼락을 맞으면서 고통과 시련으로 뒤범벅됐다. 2009년 파업 기간 쌍용차 노조에서 대언론창구를 담당했던 이창근은 77일 파업이 끝나자마자 구속됐고, 이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김정욱도 6개월간 평택과 수원구치소를 전전했다.
-평범한 노동자의 삶이 바뀐 이유는.
“입사 8년 만에 해고됐고, 운명의 장난처럼 파업을 맞았다. 해고에 맞선 싸움을 회피하지 않고 그 중심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던 내 발걸음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 있다. 더 이상 이런 싸움을 하기 싫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한다.”(이창근)
“부산 신발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쌍용차는 거기에 비해 공장 규모도 크고 사람들도 많지만 뭔가 변화가 없으면 우리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였다. 2009년 이후 여러 일을 겪으면서 삶이 크게 바뀌었다. 많이 울고 많이 아파하면서 바뀐 것이다.”(김정욱)
“피고(쌍용자동차)가 2009년 6월8일 원고들(해고노동자)에게 한 해고는 모두 무효임을 확인한다.” 지난해 2월7일 항소심 판결은 한줄기 희망이었다. 회사 쪽 손을 들어줬던 1심 판결과 달리 고법이 해고 무효 판결을 내리면서 지난한 싸움을 끝내고 일터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복직의 꿈은 9개월 만에 와르르 무너졌다.
지난해 11월13일 대법원은 원고들이 승소했던 원심을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며 파기했다. 대법 판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창근은 “6년 동안 별의 별 것 싸워봤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해고자들을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정욱은 ‘쌍용차 정리·징계해고자 000’라고 적힌 A4용지 150여장을 공중으로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결과가 잘 나오면, 해고자 이름이 적힌 이 종이들 다 찢어버리려고 했어요.”
이창근은 “정권과 자본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대법원의 앵무새들이 수많은 노동자와 서민들을 죽이고 있다. 대법원의 환골탈태 없이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한 사례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정욱은 가진 자들의 잣대로 법을 집행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분하다고 했다.
사법부가 등을 돌리고, 정치권도 외면하자 두 사람은 “이번에는 끝을 보겠다”는 비장함으로 공장 굴뚝에 올랐다. 지금의 모습으로 손을 잡아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복직해서 동료들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었다. 하지만 해고의 낙인은 깊고도 컸다. 2009년 파업의 시작점이자 노동의 고향인 공장, 그곳에 가면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요구는 간단하다. 대화로 해고자 문제를 풀자는 것이다. 회사는 굴뚝농성을 해제하면 3자협의(회사-기업노조-쌍용차지부)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면서도 굴뚝 농성 두 사람을 형사고소하고 농성을 풀지 않을 경우 하루에 200만원(한 명당 100만원)의 간접강제금을 부과하도록 하는 퇴거 단행 가처분 신청을 내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9일 굴뚝 농성을 지원하는 평택공장 인근 천막농성장에서 만난 김정운 쌍용차지부 수석부지장은 “해고자 문제를 대화로 풀자는 것이 노조의 일관된 입장”이라며 “신차가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회사는 노조와 전폭적인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쌍용차는 13일 4년 만에 새 모델 소형 SUV ‘티볼리’를 공개했다. 그는 “‘이창근과 김정욱이 만드는 티볼리를 타고 싶다’는 응원이 전국 곳곳에서 물결치고 있다”며 “회사는 ‘신차 판매로 경영이 정상화되면 해고자 복직을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를 버리고 해고자 복직 문제를 풀어 국민들이 쌍용차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굴뚝인’ 이창근·김정욱은 거리에서 노숙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특히 이창근은 파업 이후 지금까지 언론 담당을 하면서 숱한 언론인들과 교분을 나눴다. 그는 인사하려면 끝이 없다며 너무 고마운 기자들이라고 했다.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고 내게 물으면 ‘동료들의 죽음이 스승의 절반이고, 30%는 기자와 작가, 피디 등 언론인들이다’라고 말한다.”
김정욱은 “최근 쌍용차 해고 문제를 다루는 기사에는 진실한 마음이 담긴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 얘기가 포장해서 나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보여지는 모습들, 사실 그대로만 나가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고 했다.
굴뚝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굴뚝으로의 소통 수단은 휴대폰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연락을 주고받고, 햇살이 따뜻한 오후 2~4시에는 가끔 영상통화도 한다. 그래야 20분을 넘기지 못한다. 배터리가 고공의 추위에 빨리 방전되기 때문이다. 태양열판으로 배터리를 채우지만 날씨라는 변수에 제약이 많다. 언론 보도는 그날그날 확인한다. 페이스북이나 메일로 소식을 알려주는 기자들 덕분이다.
굴뚝과 지상을 나눈 공간만큼이나 동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깝다. 웃는지, 찡그리는지 얼굴 표정은 분간이 안 가지만 굴뚝에서 동료들을 내려다보면 애틋하면서 그립다. 공장 안 동료들과 손 흔들며 인사 나눌 때 굴뚝 위 서러움은 찬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진다. “평소 가깝게 지낸 동지들도 6년간 같이 싸우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니 모두가 사랑스럽고 귀엽다.(웃음)”(이창근)
두 사람은 영하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을미년 새해를 70m 굴뚝 위에서 맞았다. 그들의 새해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불만, 분노 등을 태웠다. 불만과 화남을 없애고 남는 게 소망 아닌가. 젖어있는 옷을 말리는 것이 희망이고 소망이다. 젖어있는 옷을 두고 다른 옷을 껴입는다고 소망과 희망은 아니다. 분노와 화남을 버리고 내려놓으면 내가 편해지고 세상이 밝아 보인다.”(이창근)
“쌍용차 문제가 해결돼 웃으면서 내려갔으면 한다. 쌍용차 문제뿐만 아니라 강정마을, 밀양송전탑 등 수년째 풀리지 않고 있는 여러 문제가 잘 해결됐으면 한다. 새해 아침에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김정욱)
13일로 굴뚝 농성 32일째, 두 사람은 언제쯤 따뜻한 밥 한 끼를 가족들과 먹을 수 있을까. 지독한 강추위가 쉼 없이 얼굴을 때리고 극한 현실은 검은 밤바다처럼 암담하다. 김정욱은 귀에 동상기가 있고 이창근은 타박상처럼 온 몸에 멍이 들었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육체적인 고통은 감내한다지만 회사의 전향적인 태도가 없는 게 더욱 고통스럽다. 그나마 지상에서 보내는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 응원이 위안이다. 눈바람 맞으며 한 달 넘게 굴뚝에서 지내는 둘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일까.
“창근씨는 항상 배려하고 챙기는 사람이다. 함께 올라와 있는 거 보면 죽을 때 같이 못가더라도 그때까지 갈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사람이다.”(김정욱)
“누구보다 노조에 대한 애정이 많다. 어떤 노조냐 하면, 99마리 양이 아니라 길 잃은 1마리 양을 돌보는 노조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챙기는 마음이 애틋하다.”(이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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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인’과의 남다른 인연
내 마음 알아준 SBS 박민하 기자
배려할 줄 아는 서울신문 오세진 기자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은 2009년 77일 옥쇄파업으로 평택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SBS 박민하 기자의 칼럼을 보고 펑펑 울었다. 박 기자가 SBS 취재파일에 올린 ‘이 부장의 마지막 문자 메시지’라는 칼럼 때문이다. 쌍용차 사태 당시 대언론담당 창구였던 그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기 직전 기자들에게 “고맙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박 기자는 그의 문자메시지를 모티브로 “…그의 마지막 문자메시지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왔습니다. 무엇이 마지막 순간에도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남길 만큼 그를 의연하게 했을까…. 저 역시 그에게 감사할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라고 썼다.
“파업 기간 인터뷰할 때 잠시 스치던 기자였습니다. 그런 기자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기자가 있구나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드렸어요.” 구속된 상황에서 주고받은 편지를 자신의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는 SBS 또 다른 기자는 옥고를 치르던 그에게 큰 용기를 줬다. 대법원 패소 후 방송국에서 만났던 JTBC 박창섭 작가도 잊을 수 없다. 박 작가는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잊지 못하며 연신 눈시울을 훔쳤다. 이창근 실장은 “알게 모르게 도움 줬던 기자들이 너무 많다. 인사 하려면 끝이 없다. 너무 고마운 기자들”이라고 거듭 말했다.
김정욱 사무국장은 서울신문 오세진 기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속적으로 쌍용차 문제를 모니터링하고 전화를 걸어와 최근 상황을 질문한다. 처음에는 질문이 많아 귀찮았는데 통화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다. 충실하고 진실하게 담으려는 마음이 고맙다. 그런 기자들에게는 속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기자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 국장은 “기자가 되려고 했을 때 초심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기자의 사명감을 갖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사를 썼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