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한 한정식 집 앞. 낮은 지붕들 사이로 내리는 겨울 햇살을 받으며 시인을 기다렸다. 골목거리 위아래를 번갈아가며 살피길 10여분, 중절모에 마른 체구의 노신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 고은 시인이었다. 그윽한 두 눈은 생기가 넘쳤고, 낯빛은 미소년처럼 환했다. 인사를 나누고 한정식 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시대를 살아온 거인 같은 시인을 마주하자 가슴이 떨렸다. 매생이탕에 삶은 꼬막, 소주 한 병을 주문하고 미리 준비한 질문지를 쭈뼛거리며 꺼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투명한 정신의 시인에게 하찮은 질문이 심연의 존엄에 누가 될까 덜컥 겁이 났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는 질문에 시인은 “아직도 철이 없다. 세상을 잘 살지 못해 연륜이 없는 슬픈 존재”라며 허허허 웃었다.
올해로 등단 57년을 맞는 그의 삶의 변곡점에는 언론이 있었다. 한국전쟁의 충격으로 삶의 환멸과 허무의 늪에 빠져있던 그에게 1970년 술집 바닥에 뒹굴던 신문에서 본 전태일의 죽음은 머리를 울렸다. 그 길로 현실 세계에 발을 내딛고 지금껏 걸어 왔다. 10여 년간 출가를 했던 그가 문단에 이름을 올린 것도 신문이 연결고리였다. 1957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초대주필이 된 그는 신문 지면을 채우기 위해 시를 써 넣었다. 이를 본 지인의 소개로 미당 서정주를 만났고,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그는 신문을 통해 세상에 인사를 건넨다. 숱하게 밀려오는 인터뷰와 원고 청탁으로 작품 집필이 어려워 꺼려지기도 하지만 ‘세상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에 응한다. 지난 1월부터는 중앙일보에 월간으로 ‘고은의 편지’를 연재하고 있다. “작품을 쓸 때는 시간을 쏟기 힘들지만 끝난 후나 휴식기 틈틈이 해요. 세상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거죠.”
시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친필로 글을 쓴다. 펜을 들고 백지와 마주한 순간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손이 불편할 때까지 계속 친필로 쓰겠다는 그. “백지에는 영원한 매혹이 있어요. 백지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것은 제 몸 전부를 대표한 거죠. 내가 살아있는 어떤 의식이나 정서, 이런 내용을 종합하는 혼이라고 할까. 정신의 조각이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아직 글을 떠날 수가 없어요.”
70년대 기자들 울고 분노했죠
지금 우는 기자들이 있는지 모르겠어
6·25때 좌·우익 보복학살에 인간 부정
전태일 죽음 접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
이육사의 ‘광야’는 시를 알게 했고
‘한하운 시초’는 시에 뛰어들게 했어
현장에서 사람 만나는 건 기자의 운명
나흘은 잠들어도 사흘은 깨어 있어야
“참 눈물이 있는 삶이었지. 그때는.”
고은 시인은 오늘날 미디어에 ‘울음’이 없다고 했다. 차가운 공간에서 취재하고 차가운 액면과 언어로 기사를 쓰면서 뜨거움이, 땀 흘리는 얼굴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고 했다. “70년대만 해도 기자들이 참 많이 울었습니다. 통음(痛飮)을 하면서 술잔을 던지고 비탄에 젖거나 분노했죠. 시인도 똑같았어요. 그것은 일종의 문학 행위였죠. 낮의 직장보다 밤에 더 뜨겁게 흉금을 털어놓으며 우리는 질적으로 교감했죠. 지금은 우는 기자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식민 시대부터 독재정권 시대까지 기자 한 명 한 명의 필봉(筆鋒ㆍ붓끝)에는 지사(志士)적 풍토가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라는 개념으로 넓어진 현재 언론은 이미 탈 지사적인 의미가 됐다. 기자들은 파편화되고 개체화됐고, 언론은 기능화 됐다. 고은 시인은 “굳이 지사적인 성정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며 “지금은 지금대로 언론인의 초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계가 없던 기자와 작가는 완전히 분화됐다. 신채호(황성신문), 염상섭(동아일보ㆍ경향신문) 등 수많은 문인들은 언론을 이끌어왔다. “70~80년대까지 기자와 작가의 분명한 경계가 없었어요. 낮에는 언론인 밤에는 작가였지만, 지금은 밤낮 모두 한곳에만 있죠. 분화가 행복한 것인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자화상을 그리기에는 독자적인 영역이 확실해졌다는 점이 과거와 차이가 있죠.”
하지만 ‘현장’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기자가 현장에 가는 한 그것은 다른 존재의 ‘심장’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문명이 발전해도 늘 사람을 만나고 현장에 가야 하는 것은 기자로서 불변의 원칙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영원히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언론의 언어도 현장에 있다. 1차적인 언론의 언어와 2차적인 시의 언어. “언론의 언어는 직접언어로 필수품처럼 중요하죠. 시의 언어는 현장에는 없지만 본질적이에요. 그래서 언론의 배후에는 반드시 시가 있어요. 최고의 기사는 아마 시적인 기사일 겁니다.”
순수시를 고집했던 시인이 세상과 마주한 계기는 신문 한 귀퉁이의 단신 기사였다. 한국전쟁 이후 허무주의에 빠진 그는 대통령의 이름을 아는 것조차 시 세계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1970년 11월, 술에 빠져 살던 여느 날처럼 통행금지에 막혀 술집 탁자에 쪼그려 잠을 청하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쓰린 속을 부여잡다가 김치 가닥, 담배꽁초와 뒤엉켜 있던 신문 쪼가리 하나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2~3일쯤 지난 신문이었을까. 신문 하단의 2단 짜리 기사에 유난히 눈이 사로잡혔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죽음이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죽음을 이루고 있는 모순과 사회 현실이 폐부를 찔렀죠. 순간의 전회(轉回)였어요. 그때 안개가 걷히면서 사회와의 대면이 시작됐죠. 거리에 나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길로 지금까지 오게 됐죠. 어쩌면 세상이 제게 ‘너 이제부터 이런 일을 하라’고 위촉한 것 같아요.”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면서 그에게 박혀있던 죽음의 씨앗도 사라졌다. 독주를 몇 병이나 마셔도 쉬이 잠들지 못했던 불면증도 깨끗이 없어졌다. 그는 “현실로 나오면서 육체는 물론 심리적 결함까지 없어졌다”며 “지금은 시인이 이렇게 잠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돼지처럼 잡니다”라고 웃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을 주도했다. 당시 엄혹했던 독재정권 시절 ‘자유’는 시대의 절실함이었다. 같은 해 언론인들은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했고 이듬해 동아일보ㆍ조선일보 해직 사태로 이어졌다. 10월23일 시인의 일기에는 시대의 통탄이 적혀 있다. ‘나 같은 순수 시인을 참여 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 군인의 시대야, 이 총검의 시대야, 이 탱크의 시대야, 이 색안경의 시대야. (책 ‘바람의 사상’)’ “그때는 자유가 최고의 명제였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지금은 소박한 원천 같은 것이지만 자유라는 말이 참 중요했어요.”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 동아일보 기자들이 거리로 쫓겨났을 때 문인들은 함께였다. 12·13대 기자협회장을 지낸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지난해 말 한겨레 특별기고에서 ‘40년만의 뒤늦은 감사’를 전했다. “1975년 3월 기자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동료 언론인만이 아니라 문인, 종교인, 변호인 등에게 모금을 부탁했다. 그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주도한 고은 선생이 약정한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숨차게 달려와,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씩 웃던 말 없는 웃음이었다. 해냈다는 안도감이 스며있는 겸손한 미소는 그분을 뵐 때마다 소박한 얼굴에 언제나 따스하게 겹쳐 다가온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한국사회를 슬픔에 빠뜨린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시인은 분노했다. 독재 정권 시절엔 정치권력이라는 단일성과의 대결이었지만 영혼이 없는 자본의 폭력과 야만에 대응하기가 참 어렵다. “착잡하죠. 우리 아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횡포, 인간을 처참하게 말살시킨 외세 횡학과 다를 바가 없어요. 누군가는 바다의 교통사고로 치부하는데 정말 분노합니다. 또 누군가는 더 중요한 일이 많다며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 하죠. 그것은 정치문화로서의 ‘자폐’에요. 절대 쉽게 지워질 수 없습니다. 상당 기간 우리사회의 모순이 표출된 사건이죠.” 그는 ‘이름짓지 못한 시’로 동료 시인들과 추모시집을 발간했다.
고은은 이육사를 통해 시를 알았고, 한하운은 그를 시에 뛰어들게 했다. 1947년 중학교 1학년 때 우리말로 된 국어교과서에서 이육사의 시 ‘광야’를 만났다. 시골의 어린 소년에게는 충격이었다. “광야! 어린아이가 본 적 없는 세계였죠. 광야라는 대공간,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의 대시간, 초인이라는 거대한 인간, 더구나 백마 타고 오는 대인간 아닌가. 대공간·대시간·대인간이 한 편의 시에 등장하고 있어요. 어린아이가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바다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상태였죠. 시가 무서웠어요.”
그랬던 시는 그를 홀리듯 운명처럼 다가왔다. 1949년 중학교 3학년 시절, 1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가에 무언가 빛나고 있었다. 깜깜한 밤길 호기심 어린 소년은 다가갔고, 매끄러운 표지의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시집 ‘한하운 시초’였죠. 그땐 누군가 제게 주려고 놓고 갔다고 생각했어요. 저녁밥이야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밤새 책보도 풀지 않은 채 읽고 또 읽었죠. ‘가도 가도 황톳길’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던 소년은 새벽에 ‘한하운처럼 문둥병자가 될 것. 한하운처럼 떠도는 시인이 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시대는 소년의 맹세를 깨버렸다. 몇 개월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죽음의 장막으로 가리어졌다. 17살, 사춘기 시절 집도 마을도 쑥대밭이 됐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보복학살을 목도하며 인간을 부정했고 허무함이 엄습했다. 수많은 시체를 묻고 온 날에는 빨래비누로 사정없이 온몸을 씻어냈지만 송장 냄새는 떠나질 않았다. 그때부터 죽음은 늘 그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수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미수에 그쳤다.
“지금도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있어요. 남북의 우리세대 절반 가까이가 죽었죠. 우리는 절반짜리에요.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명이 있죠.”
전쟁으로 찢긴 상처는 시의 근원이 됐다. 어느 시나 누구의 영향을 받은 적은 없었다. 스스로를 시의 ‘고아’라는 그는 오로지 세상의 영향을 받았다. 내면으로 깊숙이 침투한 ‘폐허’에서 시가 시작됐고 ‘애도’로 완성됐다. 1986년~2010년 24년간 5600여명에 달하는 인간상을 그린 연작시 ‘만인보’도 지나간 이들에 대한 애도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창문 하나 없던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서 만인보를 구상했다. “현재가 박탈되면서 기억 속 어린 시절이 현재를 감당하게 했죠.”
여기에 유미주의가 더해졌다. 황혼의 낙조, 밤하늘의 별빛과 꽉 찬 달빛,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는 매혹됐다. “달빛이 비치면 황홀함에 울음을 그치지 못했어요.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곡했죠. 슬픈 게 아니라 기뻐서…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시인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했을까. “모르겠다”면서도 살며시 입을 뗐다. “무덤을 참 좋아했어요. 아마도 장례 지내는 이가 되지 않았을까요.” 고향 군산부터 통영, 제주도 어디든 공동묘지는 그의 ‘단골집’이었다. “제주도 사라봉의 무덤 수를 다 알고 있었어요. 새 무덤이 오면 톡톡 다독거려주고 무덤 옆에 누워 잤죠. 그냥 편안해요. 사람들이 저보고 귀신 들렸다고 했었죠.”
등단은 필연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17살의 소년은 자석에 이끌리듯 무작정 한 스님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10여년을 불교에 귀의했다. 1957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주필이 된 그는 신문을 제작하면서 빈 공간을 채우려 시를 몇 자 넣었고, 당시 효봉 스님을 자주 찾아오던 교통부 국장에 이끌려 서정주 시인을 만났다. 서정주의 추천으로 그는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등 3편을 발표했다. 또 같은 해 한 친구가 신인을 발굴한다는 기사를 읽고 한국시인협회에 그의 시를 보냈고, ‘폐결핵’이 기관지에 실렸다. 당시 시인협회 회장은 조지훈이었다.
통일과 평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고은 시인은 현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남북으로 흩어진 우리말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다. 남북관계 경색으로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분단 70년을 맞은 올해 통일을 염원하면서 사업 추진을 기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모국어가 금지된 식민 시대를 살았고 우리말을 찾아 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하고 있어요. 남북과 각 나라로 쪼개진 우리말의 짝을 맞추는 겁니다. 통일의 한 기반으로 통일언어의 원천이 될 수 있죠.”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기자들에게 “한잔 하자”며 술병을 들었다. 다음 약속이 있어 목만 축이던 시인은 옛 생각에 “열이 난다”며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짧은 시간이지만 쌓인 정에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얼굴 보니 여기가 더 좋아. 만나면 정 들잖아. 미치는 거지.(웃음)”
애주가로 소문난 그에게 술에 대해 물었다. “모든 세상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하는데 술에 관한 한 참 오만하죠. 얘(술)가 날 참 좋아해요. 자타를 구분하고 마시면 앙갚음할 텐데 뒤를 생각 안하고 마시니 좋아하지.” 고은 시인의 시 ‘술’의 한 구절엔 모든 것이 담겼다. ‘나 이 세상에 깨닫기 위해 오지 않았다. 취하기 위해 왔다. 취한 것만이 살아있다. 오, 내 이웃인 취한 은하수여.’
술만큼 그를 유혹하는 것은 책이다. 서재에는 수만 권의 책이 빼곡히 차 있다. 서점을 직접 찾고 늘 신간을 만난다. 이날도 서점에 들러 책 7권을 부쳤다고 했다. 책을 마주할 때면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는 설렘”에 가득 찬다. “참 좋은 책이 많아요. 난 책이 술이에요. 책에 취하지. (술병을 가리키며) 이것보다 책이 더 좋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가끔 (술과) 헷갈리죠.”
기자들에게 해주고픈 말을 물었다. “나흘은 잠들어도 좋은데 사흘은 깨어 있어라. 그냥 그렇게만 말하소.” 시인은 더 이상 무엇을 말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강진아 기자 saintse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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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와 호형호제, 천관우·김병익과 술잔 나눠
■고은 시인의 친구, 언론인들
고은 시인은 기자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을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리영희·천관우·최일남·선우휘·김병익·김중배·남재희 등과 술잔을 기울이며 1970~80년대 엄혹했던 시절에 맞서고 견뎠다.
“최일남은 훌륭한 작가이면서 품위를 잘 지키는 훌륭한 언론인이죠. 요만한 부정도 없을 거에요. 아주 무섭지. 그렇게 자신을 억제하고 공공성을 지속시키는 참 위대한 사람이죠.” 고은 시인은 기자협회 사무실에서 천관우 선생을 만났다. “맥주잔에 소주를 넘치게 부어 캭 소리가 나게 먹었죠. 통음을 하다가 싸움도 하고 부둥켜안기도 했죠. 돌이켜보면 귀한 황금기였죠. 그이는 세상에 대한 예절이 아주 돈독해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제게도 꼭 선생으로 호칭해줬어요. 김병익·선우휘와도 참 술 많이 먹었죠.”
고 리영희 선생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복역하다 풀려나면서 다시 술을 입에 댔어요. 그때 리영희 선생과 보문동 어느 술집을 갔었죠. 통행금지 시간이 다 돼가는데 술집 주인이 안 가도 좋다고 하는 거야. 특혜였지. 아마도 우리가 노는 걸 듣고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아. 다음날 아침에 깨보니까 내가 동생이 돼 있더라고. 리 선생이 나한테 ‘적은이 속 괜찮어?’라고 하기에 무슨 소린가 했지. 알고 보니까 평안도 말로 ‘적은이’가 동생이란 뜻이야. 취중에 형제를 결의한 거지. 그 뒤로 완전히 형제로 굳어졌죠.”
고은 시인은 남재희 선생과 인연도 풀어놨다. “술 많이 얻어 먹었어.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니까 돈 있고 나는 땡전 한 푼 없으니까…. 그처럼 공부하는 언론인이 지금은 없죠. 글도 좋아요. 심정이 있는 글을 쓰잖아요. 울리잖아요. 담백하고 떠벌이지 않고….” 그 시절, 기자들을 회상하는 고은 시인의 얼굴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김성후·강진아 기자